나카타 히데토시 일본 최고의 축구선수(Feat. 때이른 너무 빠른 은퇴)
일본 출신으로
역대 최고의 일본 축구스타 중
한 명으로 꼽혔으며
전성기를
세리에A에서 보내며
임팩트있는
활약을 보인 바 있으며
29세의
젊은 나이에
은퇴를 선언하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제대로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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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형 선수였으며
미우라와 함께
일본 최고의 축구선수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선수로
일본에선 영웅.
은퇴 후,
현재에는 다양한 활동으로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활동 중.
홍명보와 함께 뛰었던 J리그 시절
현재까지도
현역으로 뛰고있는
스트라이커 미우라의 뒤를 이을
일본 차세대 스타로
평가 받았으며
유스 시절을 포함하여
연령별 일본 국대로 활약하며
쑥쑥 성장한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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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벨마레 히라츠카 소속으로
프로 데뷔했으며
같은 팀에
홍명보와 함께 뛰기도 했으며
나카타가 중원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수행함에 따라
홍명보가 포지션적으로
희생을 당했던 시절도 존재.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브라질을 꺾는 이변을 연출 했을 때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도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결국 그 때에 세계적인 관심과 함께
세리에A 페루자로
이적에 성공한다.
세리에A 진출, 첫 팀은 페루자
1997~1998년
2년 연속으로
올해의 아시아 선수상을 수상하며
기량이 성장한
나카타의 폼은 절정이였고
세리에A 페루자
입단 당시,
나이가 21살이었으니
그는 그야말로
천재성을 가진 선수였고
연고나 지연없이
오로지 세계적인 무대에서 활약으로
J리그 -> 세리에A
진출 했다는 것만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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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해에
리그 33경기 출전
10골이라는 좋은 스탯을 보이며
활약했고
변방의 아시아 선수가
기대이상의
경기력과 함께
여담이지만
경기장 밖에서도
뛰어난 사복 패션을 바탕으로
패션의 콧대가 높은
이탈리아 사람들 마음을 사로 잡으며
그는 더 유명해졌고
지금도 명문이지만
그 당시,
더욱더 명문이였던
토티의 AS로마로부터
오퍼를 받았다.
확실한 임팩트, AS로마 시절
토티를 중심으로
화려한 라인업을 가지고 있던
AS로마가
나카타를 영입하자
일본 자국 팬들은 물론
전 세계가
주목할 수 밖에 없었고
로마 입장에서는
토티의 체력안배를 해줄 수 있는
비슷한 자원의
영입으로 나카타를 지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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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1 시즌
AS로마는 라이벌 유벤투스를
따돌리고
리그에서 우승했는데
가장 중요한 승부처였던
유벤투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나카타는 교체로 들어가
만회골과
극적인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는 맹활약을 펼치며
우승에 기여한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건
토티가 존재하고 있는 로마에
나카타는 베스트11이
될 순 없었지만
준주전급 선수였으며
교체로 들어가
충분히 분위기를 바꾸어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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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타는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많은 경기를 뛰며
폼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이적을 도모했고
결국 파르마로 이적했으며
당시 1,850만 파운드의 높은 이적료를
책정받으며
높은 가치를 자랑했다.
하락세, 파르마 이적 -> 볼튼임대 -> 은퇴
파르마 이적 후,
초반에는 폼이 좋았고
01-02 시즌
코파 이탈리아 결승전에서
유벤투스를
누르고 우승 트로피를 따내는 데
결정적 역할.
하지만,
2002 한일월드컵에서
활약하며
폼을 유지하는 듯 했으나
그 이후로
조금씩 폼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부진의 연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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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이 발생하고
팀 내 감독과 불화를 겪으며
나카타는 점점 더
팀에서 겉돌게 되었고
이 때부터
여러 팀에서 임대생활을
시작하면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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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로냐, 피오렌티나 등
이탈리아 무대에서 계속 임대로 뛰며
재기를 노렸지만
폼이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결국 볼튼으로
건너가 새로운 도전에 나섰으나
그것마져 실패수순.
2006 독일월드컵을
끝으로
나카타는 돌연 은퇴를 선언했고
모두가 충격,
그 이유는
불과 그의 나이 29세.
모두가
일시적인 은퇴라고 여겼지만
나카타는 결국
현역으로 다시 돌아오지 않으며
굉장히 이른 시점에
현역에서 물러났다.
국가대표로써의 나카타 히데토시
연령별 대표를 모두 거친
엘리트 선수로
1997년
한일전 평가전을 통해
국대에 데뷔했다.
1998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보여주며
조국의
최초 월드컵 본선진출을 이끌었고
월드컵에서도
개인적으론 훌륭한 활약으로
세리에A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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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속
올해의 아시아선수상을 수상했고
2002 한일월드컵에서도
에이스 역할로
최초 16강 진출을 이끌며
클래스 시전.
허나
이 대회 후,
클럽과 국대에서 부진했고
폼이 떨어지더니
2006 독일월드컵에
출전하기는 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으며
그 대회 후
전격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A매치 77경기 11골
나카타 히데토시에 대한 TMI
01. 어려워진 소속팀의 스폰서를 자청했다
AS로마 이적 후,
J리그 전 소속팀 벨마레가
재정사정이 어려워지며 구단이 위태롭자
본인 스스로가
스폰서를 자청하며
구단 자체의 구세주가 되었으며
현재까지도
스폰서를 계속 진행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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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홍명보와 친분이 두텁다
벨마레에서
같이 뛰었던 시절도 있었으며
한일전이라는
라이벌 관계 속 에이스였기에
지속적으로
비교 및 평가가
이루어졌던 것도 있고
여러가지로 마주칠 일이 많아
친분이 두텁다고 알려져 있으며
홍명보는 자신의 자서전을 통해
같이 뛸 때에
나카타는 영어사전을
끼고 살았던 선수, 미래를 준비하는
멋진 선수였다고
코멘트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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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아시아 유니폼 팔이(?)의 원조격이다
지금까지도 유럽 빅클럽들이
아시아 선수를
영입할 때에는 마케팅용,
즉 유니폼 판매를 위해
영입한다는 이미지가 존재.
나카타가 세리에A 이적 당시,
한참 일본인들이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유럽관광을 자주가던 시기였고
자국 선수를
보러가기위해 여행투어 겸
경기장도 많이 찾았고
유니폼도 엄청 팔렸다는..
그 후로
나카타로 재미를 본 유럽 구단들이
실력은 좀 부족해도
일본선수들을 영입하기 시작했다는데..
물론 나카타는
그러한 개념의
유니폼팔이가 아닌
실력이 자체적으로 뛰어난 선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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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패션센스가 좋은 선수로 익히 알려져 있다
사복패션이 굉장히 뛰어난 선수였으며
미국의 남성잡지
GQ에 따로 소개된 적도 있으며
또 다른 미국 패션잡지
베너티 페어가 선정한
패셔니스타 8위에 선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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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펠레가 선정한 FIFA100인에 포함되었다
이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펠레의 저주)
하여간 2004년
펠레가 직접 선정한
FIFA100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아시아 선수로는
홍명보와 나카타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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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세계적인 선수들과 인맥을 자랑한다
전성기를 세리에A에서 보내며
그 시절 함께 뛰었던
세계적인 스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는 지
네임벨류가 뛰어난 인맥을 자랑.
본인의 이름을 내건
자선 축구경기에서 참여한 선수 목록은
피구, 칸나바로, 지단, 이에로 등
면면히 화려하고
심지어 무리뉴 감독까지 초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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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게이 의혹이 있다
일본 여자 연예인들과 여러 번
스캔들이 나기도 했던
그이지만 이상하게도 그는 꾸준하게
게이 의혹을 받았으며
그가 평소에
성소수자를 옹호하는 발언들을
자주해서 그럴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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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위닝일레븐 능력치가 캐사기다
간단하다.
위닝일레븐 시리즈는
일본에서 만드는 축구게임이고
자국의 스타들은
이상할 정도로
능력치가 높게 설정되는데
일반 능력치가
평균적으로 낮은 편이어도
실제 사용감은
거의 지단급이며
미래에 반영되는 최대 능력치 수치도
대한민국 선수보다
훨~~씬 더 높게 측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