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적
1루수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며
삼성라이온즈, 치바 롯데 마린즈, 요미우리 등
많은 기록들을 써낸
레전드 선수.
대표적인 별명을 가지고 있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
금메달 주역으로도 활약했고
국내선수 기준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1992년
경복고에 입학했고
본래 투수였으며 타자로도 좋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결국 북치고 장구치며
팀을 청룡기 우승을 이끌고
청룡기 대회
최우수 투수상을 차지하며
투수로써도
확실히 능력이 있었고
결장하게 되었고
이 때에 부상으로 인해서
군면제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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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고등학교 졸업 후,
한양대 입학이 기정사실화 되어있었으나
수능 40점 미만을 받으며
입학제한 사례가 되어
결국 삼성 라이온즈와 계약하며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후에 힐링캠프를 통해
가장 큰 이유는
한양대 OT에 참석했는데
선배들이 너무
술을 많이 먹였단다..ㅎ
삼성 입단 시,
역시 투수로 분류되며 기대감을 모았으나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투구 자체가
어려움이 있자
삼성 코치진은 그가 타격에도
소질이 있음을 파악하고
타자로 전향을
권유했고
일단 1년만 타자로 뛰어보자며
신인이었던 그를
1루수로 기용하고 1루수였던
양준혁을 외야로 돌린다.
신인 시절
13개의 홈런을 비롯하여
기대이상으로 타격에서 좋은 모습을 보였고
이듬해 삼성 감독으로
이것이 이승엽을
2년차에
9개의 홈런으로 오히려
신인 때보다
홈런 갯수가 줄어들기는 했으나
3년차부터
홈런타자로써
완벽하게 대폭발하기 시작.
3년차였던
1997년 32개의 홈런과 함께
0.329의 타율과
114개의 타점을 기록하게 되면서
KBO A급 타자로
순식간에 성장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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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로 2003년 시즌까지
매 시즌
최소 30개 이상의 홈런을 때려내는 등
KBO을 대표하는
최고의 홈런타자 자리에 위치했고
당시 플레이오프 진출도
간당간당했던
삼성 라이온즈마져
강팀으로 만들어내는 주역이 되면서
최고의 스타로 우뚝.
2001년에는
전성기를 이어갔고
기존의 KBO의
홈런 기록은 나란히
1,2위 차지하고 있었던
42개의 타이거 우즈와 41개의 장종훈의
기록보다 10개가 넘는
독보적인 기록으로
그의 주가는
대폭발 그 이상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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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다리타법에 약점이
드러나며
잠시 부진한 시기가 존재하기도 했으나
그 부진할 때에도
30개 이상의 홈런은 때렸으니
클래스가 다른 수준.
결국 그는
어느정도 폼을 수정하며 다시 일어섰고
2002 시즌 47개의 홈런으로
홈런왕 타이틀을
차지하며 어느정도 예열하더니
2003 시즌
대폭발과 함께
현재까지도
KBO 한 시즌 최다홈런과 함께
동양인 한 시즌 최다홈런
타이틀의 기록을 만들어버렸다.
2003 시즌은
이승엽과 함께 시즌 막판까지
홈런 레이스를 펼친
심정수의 성적과 활약도 놀라운 편이라
역대급 시즌이자
KBO의 인기도
수직상승했던 시기.
다시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서
삼성 라이온즈 1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의
최고의 선수가 되었다.
2003 시즌 후,
FA가 된 이승엽에게 메이저리그
진출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은 높았으나
생각만큼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이승엽은 11월이 넘어서야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거취에 대해 밝혔으며
치바 롯데와
2년 계약을 맺었고 생각보다
짧은 계약기간은
그 후,
메이저리그 재도전에 대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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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나쁘지 않았는데
일본 진출 이후
첫 홈런이 장외홈런으로 이루어졌으며
역풍이 부는 상황 속에서도
그것을 뚫어냈고
그 공이
주차장에 주차된 차의 유리를
깨버리는 등
확실히 임팩트를 제대로 보여준
데뷔홈런.
하지만, 조금씩
시즌이 거듭되면서 일본리그 투수들은
이승엽의 약점을
파악하기 시작했고
이승엽은 부진의 늪에 빠지며
0.240의 타율로
부진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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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시즌을 앞두고
치바 롯데 투수코치로 들어오게된
김성근과 야간에도
끝없이 훈련을 반복하며
스스로를 단련시켰고
엄밀히 말하면
김성근 코치는 투수코치이기 때문에
타격코치나 감독을 대신해
이승엽을 훈련시키는 것이 엄밀히 말해
구단 방침을 어기는 것이라
두 사람은 여기저기
몰래 다니며 훈련을 했다고
후에 밝힌 바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지만,
이승엽은 좌절하지 않았고
1군에 콜업된 후
곧장 홈런포를 쏘아올리는 등
저력을 발휘하며
결국 두 번째 시즌에서 30개의 홈런과 함께
82타점을 기록하며
나름대로 부활한 모습을 보였고
이 시즌에
이승엽을 포함하여
팀 전체를
플래툰 시스템을 가동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낸 수치라
더욱더 값어치있는 수치.
치바 롯데와
계약이 모두 끝나게 되면서
재계약 과정에서
이승엽은 수비보장이라는 딜을 걸었으나
구단에서 거절하게 되면서
새로운 팀과
계약을 알아보게 되었다.
치바 롯데에서
받았던 연봉보다 약 10억이나 낮아진
금액으로 연봉을 낮추어
일본 명문
시즌 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미친 활약을 보이며
이승엽에 대한 기대감은 더더욱
높아졌으나
시범경기에서는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의구심...
하지만
요미우리 데뷔전이자 개막전에서
만들어내며 활약을 시작했고
일본리그
홈런 1위 페이스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이 해에는
일본으로 역시 건너온
타이거 우즈와
다시 한 번 홈런 레이스를 펼치는 등
언론에서도 자주 비교하며
재밌는 시즌을 이어갔고
결국 요미우리 첫 해에
그야말로 기사회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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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계약이 만료되었고
요미우리 구단은
이승엽에게 4년 30억엔이라는 거액을 딜하며
구단의 그 선택은
최악의 결말을 낳았.....
30홈런을 채웠으나
확실히 지난 시즌에 비해서 부진했으며
시즌이 끝남과 동시에
통증을 유발했던 엄지손가락 수술을 감행하며
이 때부터 그의 폼은
더더욱 하락하기 시작했는데
타율은 1할대로
떨어지는 등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국 계약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0년까지도
이승엽은 몸값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팀에 도움이 되지 못했고
팀을 떠나게 되었다.
요미우리에서 사실상
방출통보를 받으며 새로운 팀을 찾다가
삼성 복귀설도 있었으나
1억 5천만엔이었으니
먹튀의 선수가 받은 연봉이라고 생각하면
어느정도 높은 편이었고
이 때에 오릭스는
노장 박찬호까지 영입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현재 실력보단
이승연은 입단 후,
홈런포를 쏘아올리며 조금이라도
다시 부활하나 싶었으나
여전히 떨어진 폼은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았고
또 다시 1군과 2군 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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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제대로
족적을 남기지 못한 채
오릭스와도
1년만에 결별을 해야했고
요미우리에 이어서
오릭스에서도 팬들에게 먹튀 소리를 들으며
조금은 씁쓸하게
일본 무대를 마무리 짓게 되었으며
여러가지 이유와 상황들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확실히 이승엽은 일본무대에서
임팩트는 남겼을 지라도
전체적으로 본다면
실패한 시즌과 시기가 되었다.
2011년 겨울
삼성 라이온즈와 다시 계약을 맺으며
국내 무대로 복귀했고
연봉 8억과 계약금 3억을 합친
곧장 이승엽은
시범경기부터 날아오른 모습을 보였고
장타보단 출류율을
높이는 데 주력하는 느낌.
결국 복귀 시즌,
팀이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하면서
함께 날아올랐고
한국시리즈에서 중요한 순간
홈런포를 가동하는 등
팀의 우승 주역이 되면서
더할나위 없는 복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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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시즌
삼성은 우승을 차지하기는 했으나
이승엽 스스로는
만족하지 못할 부진의 시간들을 보냈으며
확실히 폼이 떨어진 모습.
2014 시즌 지명타자로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연봉 협상에서도
1억이 상승한 9억에 재계약.
2015 시즌
KBO 통산 400호 홈런을 돌파했고
3할 이상의 타율을 보이는 등
삼성은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기는 했으나
그나마 이름값을
했던 선수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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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즌에도
준수한 활약과 함께 전성기와 비교하면
아쉬울 순 있지만
노장의 선수로써는 확실히
여러가지 역할로
팀에 기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의 은퇴 시즌이 되었던
2017 시즌에는
스탯이나 여러가지 측면에서
아쉬웠을 지 몰라도
국민타자이자 홈런타자로
불렸는 지
제대로 입증해주며 은퇴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티켓을 따내기위한 1999 아시안 선수권에서
국가대표로 활약하면서
가장 중요했던
대만전에서 홈런포를 가동하며
최대 주역으로 활약.
그리고 시드니올림픽
가장 기대하는 타자로 꼽혔던 그는
대회내내 부진하며
이름값을 못했는데
일본과의 동메달 결정전에서
결국 팀의 3:1 승리와 함께
동메달의 다시 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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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몰아치는 등
세계적인 선수들을 상대로
거침없는 활약을 보이며
요미우리 입단이 확정된 후,
참가한 대회였기에
더욱더 아쉬움이 남았던 것.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들에게
깊은 관심을 받았던 순간이 되었다.
그리고 백미였던
일본에서 부진하던
이승엽을 굳이 대표팀에 넣어야하냐는
부정적인 여론도 많았지만
당시 김경문 감독은
이승엽을 신뢰하며 그를 주전 1루수로
계속해서 기용했고
그는 거짓말처럼
계속 부진하며 승승장구하던
국대와 달리
부진한 상황.
하지만 중요했던
일본과의 경기에서 결승 투런포와 함께
쿠바와의 결승전에서도
1회에 투런포로
선제 득점을 귀중하게 올렸고
결국 명승부와 함께
이 경기에서 승리하게 되면서
이승엽의 야구선수로써의
인기와 가치는
굉장히 높은 편이지만
법적인 사고를 치지도 않은 이 선수의
평판이 좋지 않은 이유는
다름아닌
팬 서비스가 안좋다는 것.
사인의 희소가치를 직접 언급하면서
사인을 자주하지않는 말이
팬들에게 익히 알려지면서 평가는 더욱
안좋아졌으며
지금까지도 그 인식과
이미지가 많이 박혀있는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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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평창올림픽
개회식에서 태극기 들고 입장했으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스타 8인 중 한명으로
선정되어
이러한 영광을 누렸고
멘트 소개로는
2008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리스트로
소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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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승원이 주연을 맡았던
영화 "힘을 내요 미스터 리"에 까메오로
출연한 적이 있으며
이 때에도
이승연 선수 역할로
싸인을 안해주는 컨셉....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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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와 10개 구단이
모두 합심하여 이승엽 은퇴투어를
마련하였고
가장 큰 핵심은
구단별 방문 때마다
이승엽에게 전달하는 은퇴선물로
화제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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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별명이 붙은 이유는
그가 주축으로 활약하여 국제무대에서
4번이나 병역혜택을
받을 수 있는
성적을 가져온 것인데
정작 본인은
이미 프로에 가기 전,
팔꿈치 부상으로
병역혜택을 받은 바 있다.
병역 브로커로
그가 활약하여 결과를 만들어낸 대회는
2000 시드니올림픽,
2002 부산아시안게임, 2008 베이징올림픽,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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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내 아나운서와 선수로
처음 인연을 맺어 친해진 케이스로
이승엽이 결혼할 때에
수많은 사람을
제치고 김제동이 사회를 볼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며
일본에서 국내로 복귀한 후
2012 한국시리즈
우승과 함께 MVP가 되었을 때에도
이승엽은 유일하게
김제동이 MC를 보고있는
힐링캠프에 출연하며
우정을 제대로 보여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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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이 의식불명상태에서
그의 곁을 지키고있던
이재용 부회장을 비롯한 가족들이
삼성 라이온즈 야구를 보다가
이승엽~~ 이라는
캐스터의 소리에 이건희 회장이
눈을 떴다는 소식??
그로인해
이승엽은 "제세동기"라는 별명을 얻었고
삼성 대표이사가
직접 구단을 찾아가
감사패를 전달하기도 했다...ㄷㄷ
참고로 이건희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은
야구광으로 알려져있으며
그러한 인연때문일까?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을 때
이승연은 개인 SNS에서 저러한 글을
남기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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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프로야구 선수 최초로
교과서에 실렸으며
"진로와 직업"에 위의 사진처럼
내용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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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와 필기, 일상생활에서
모든 걸 오른손으로 해결하는 전형적인
오른손잡이이며
야구할 때에만 왼손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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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대회에서
일본선수들과 잠시 얘기를 나누는 모습이
화면에 잡혔는데
농담을 하는 듯 웃으며
대화했고
본인 스스로도
통역이 필요없는 수준으로
대화가 가능하다고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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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스포츠에 비해
지구력이나 활동량이 적은 편이라
야구선수 중에는
꽤나 술, 담배를 하는 선수도
다수 존재하는 데
이승엽은 아예 입에도 대지 않았으며
후배들에게도 왠만하면
하지않는 게
좋다는 식으로 권유했다고한다.
추신수 이마트의 남자 된다, KBO 무대 진출과 데뷔! (0) | 2021.0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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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바람의 아들 야구천재 현재는 정후 아버지 (0) | 2021.02.23 |
한국 프로야구 KBO 2020 5월5일 개막 확정! (0) | 2020.04.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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