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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범 바람의 아들 야구천재 현재는 정후 아버지

스포츠/야구

by Gugu_K 2021. 2. 23.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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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천재, 바람의 아들 이종범

대한민국 국적

유격수 포지션을 가지고 있는 야구선수.

" 바람의 아들 "  " 종범신 ",

" 야구천재 "

별명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역대 최고 유격수로 꼽힌다.

 

해태, 기아의 레전드이며

총 4번의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역이고

2번의 한국시리즈 MVP와

1번의 시즌 MVP

수상하는 등

역사 그 자체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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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말 그대로

야구를 참 정말 잘하는 선수

김응룡 감독은

명언과도 같은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 타자에선 이승엽, 투수에선 선동렬이 

제일 잘하지만

야구 자체는 이종범이 최고다. "

 

은퇴 후,

여러가지 행보를 겪다가

현재에는 LG트윈스 코치로 활약 중이며

자식농사도 잘 지어

아들 이정후는

KBO을 대표하는 타자이자

미래 메이저리거

손꼽히며

이종범 그 자체의 이름보다

이정후의 아버지

불리는 일이 늘어가고(?) 있다.

 

 

 

 

 

 

 

KBO에 나타난 야구천재

화려하고도 화려했던 KBO 데뷔 시즌

광주일고와 건국대를 졸업한 후

해태 타이거즈 입단.

당시 계약금은 7,000만원으로

데뷔시즌이 1993년.

이미 아마추어 시절부터 KBO 데뷔만 

기다릴 정도로

엄청난 재능을 인정받았고

연세대, 고려대 등에서

스카웃을 받았으나

고등학교 동료들과 함께 입단하는 조건으로

건국대를 선택했던 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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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시즌부터 날아다녔고

0.280의 타율

득점 리그 1위를 비롯하여

안타와 도루 리그 2위를 기록하는 등

환상적인 성적을 보이며

팀을 이끌었고

한국시리즈에서 더할나위 없는 활약으로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그의 활약과 반대로

아쉽게도 신인왕 타이틀을 놓치게 되었는데

바로 양신, 양준혁의 존재때문.

둘은 이 때부터

지속적으로 비교가 되었으며

둘은 오히려

사이가 좋아 즐겼다는 후문.

 

1993년 KBO에는

이종범, 양준혁을 비롯하여

이대진, 이상훈, 구대성 등

KBO 역사를 함께한

선수들이 신인으로 나왔던 해였다.

 

 

 

 

 

 

 

4할타자를 육박하는 종범신

또 한 번의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하다

이듬해

2년차 징크스라는 말이 무색하게

더욱더 좋은 활약을 보였고

꿈의 시즌 4할타자까지 넘볼 수 있는 시즌을 만들며

최종 시즌 타율은 0.393.

백인천을 잇는

KBO 역대 두 번째 기록이며

시즌 안타도 196개

200개에 아쉽게 4개 모자란 기록.

이 시즌에 도루도

84개를 기록하며 괴물 같았고

이 도루 기록은

아직까지도 KBO 최고기록이다.

 

실히 놀라운 기록이며

추후에 이종범은 인터뷰를 통해

사실 본인 스스로

4할 타율, 200안타, 100도루에 모두 도전하려고

신경을 썼다고 밝혔으며

유격수 포지션으로

이러한 기록들과 근접했다는 것만으로

그의 대단함을 말해주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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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홍의 등장으로

영향을 받은 이종범은 지금에 만족하지않고

홈런에도 관심을 보였고

맘만 먹으면

능력을 가진 그는

1997 시즌

홈런 레이스에 이승엽과 경쟁을 펼치며

29개의 홈런까지

홈런 선두로

이름을 올릴만큼 위대한 저력.

물론, 체력이 떨어지며

그 해에 홈런왕 타이틀에는 실패했으나

30-30 클럽에 가입하는 등

여전히 최고의 모습.

 

 96,97 시즌

해태 한국시리즈 2연패 우승의 

주역으로 활약했으며

97시즌에는

93시즌에 이어서

한국시리즈 MVP를 다시 수상하게 되면서

최고의 활약.

93~97포스트 시즌에서

압도적인

스탯을 기록하는 등

최고의 전성기로 나아갔으며

 

해태 구단의

재정적인 어려움과 함께

본인 스스로도 더욱더 큰 무대에서 

뛰고 싶다는

도전 의지가 맞물리게 되면서

국내 무대를 떠나

일본리그로 

새롭게 도전에 나서게 되었다.

 

 

 

 

 

 

 

 

주니치 시절, 부상과 부진의 시간

아쉬움이 많이 남는 일본 시절의 이종범

당시 4억 5천만엔이라는

거액의 현금 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곤즈가

이종범을 영입하게 되면서

해태 타이거즈도

재정 어려움을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었고

이종범 본인도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었다.

 

데뷔시즌

첫 한 달은 바람의 아들 모드를 보이며

좋은 활약을 보였고

아쉬운 수비를 잊게 만드는

폭발적인 타격으로

일본 언론들을 사로잡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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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의 집요한 데이터/분석 야구

조금씩 약점이 노출되었고

설상가상으로

투수의 공에 팔꿈치를 맞게 되면서

시즌아웃에 가까운

큰 부상으로

첫 시즌을 날리는 수준.

 

팔꿈치 부상 회복 후

무리를 주지 않기 위해서 외야수로

포지션을 변경했고

조금씩 타격에서도 나아지는 듯

활약하려 했으나

역시나 이종범은 상대팀에게 견제를 많이

받기 시작하면서

다시 부진의 늪에 빠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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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시즌과 01시즌에도

이종범의 성적은 나아질 기미가 안보였고

감독의 불화가 생기는 등

1군 엔트리에서

제외가 되는 

힘든 시기들이 오기 시작하면서

결국 01시즌 중반

주니치 구단과

서로 합의하에 계약파기를 진행하게되면서

많이 아쉬운

일본리그 생활을 정리했다.

 

 

 

 

 

 

 

기아 타이거즈 리턴, 베테랑의 품격

베테랑의 품격을 보여준 기아 타이거즈 시절

주니치 퇴단 후,

해태 시절 감독이었던 김응룡에게

전화를 걸어

함께 하고 싶다고 했으나

김응룡은 이미 삼성 감독으로 부임했고

계약적인 이유로

친정팀 해태 -> 기아로

복귀해야했다.

 

연봉 3억 5천만원과 함께

기아차를 받는

형태의 조건에 합의하며 기아 타이거즈

소속으로 복귀했고

수비부담을 줄여

타격에 집중할 수 있도록 구단에서

그를 3루수로 기용.

 

일본으로 가기 전,

그가 보여주었던 전성기 모드는 아니여도

꾸준히 3할이상을 치며

두자리수 홈런

여전히 위력적인 베이스러닝과 함께

도루능력까지 보여주며

기아 타이거즈의

중심축 역할을 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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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도중

2002년 경기도중 날아오는 공에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큰 부상을 당했고

그 이후로 

헬멧에 추가적인 보호대를 차고

경기를 치루는 등

그것이 모든 이유가 될 수는 없지만

역시 세월이 지나면서

폼이 떨어진 모습을 

지속적으로 노출하기 시작.

 

그럼에도 클래스는 여전했고

WBC2006 대회에서

4할 타율과 10개 안타 등을 기록하는 등

팀의 4강성적을 이끌며

베테랑의 품격 발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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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면서

주전에서 멀어졌고 구단에게 은퇴종용을

권유 받기도 했으나

그는 현역선수로써 남길 원했고

오히려 시즌이 시작되고

주전 선수들이

부상으로 결장하는 빈도가 늘어나면서

그 자리를 채우는

이종범의 활약도가 좋아

은퇴 안시킬 잘했다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

결국 09 시즌

이종범은 기아 타이거즈의

한국시리즈 우승

함께 하며

개인적으로 통산 4번째 우승

맛보기도 했다.

 

결국 2011 시즌을 마지막으로

그는 현역은퇴

선언하며 선수로써 커리어를 마무리 지었고

포스트 시즌,

대타 타석이 마지막이 되면서

은퇴경기 따로없이

전설을 은퇴시키는 것에 대해서 팬들은

여러가지로 아쉬움과

불만을 가졌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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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결국

2012년 무등구장에서 은퇴식을 치뤘고

시구자로 마운드에 올랐는데

이 때 시타자가

바로 자신의 아들 이정후.

 

 

 

 

 

 

 

이종범에 대한 TMI

 

 

 

01. 예상밖에 그는 왼손잡이이다

 

우투우타의 선수이지만

그는 엄밀히 말해 양손잡이도 아닌 왼손잡이.

후에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당시 왼손 글러브가 없다는 이유로

오른손으로 야구를 시작했고

그것이 쭉 이어졌다고한다.

실제로 그는 필기, 사인 등을 해줄 때에

왼손으로 하고 있으며

왠만한 건 왼손이 편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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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그의 별명은 개그맨 하청일이 지어준 것이다

 

서수남-하청일 콤비의 그 하청일이다.

그는 야구용품점을 운영하는데

그 매장의 단골이었던

이종범에게

" 바람의 아들 " 이라는 별명을 불러주며

도루를 할 때에 너무 빨라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

개인적으로

이종범 본인도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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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해태 타이거즈의 구타를 제거한 인물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선후배간의 구타는 어찌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던

그 당시의 스포츠 아구계.

이종범이 들어오면서

워낙 잘해서였을까? 선배들에게

맞는 일이 없었고

그 역시도 후배를 때리는 일이 없어서

자연스럽게 구단 내

구타가 사라졌다고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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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이치로, 마쓰이와 비교되기도 했다

 

처음 이종범이

일본으로 건너가 좋은 활약을 펼치자

한국의 이치로로

소개되기도 했으나 

부진이 이어지자 이치로와 비슷한 건

빠른 발만 있는 게 아니냐

비난을 당했다.

사실, 이치로는 포지션도 그렇고

플레이 스타일이

마쓰이와 비슷한 면이 더 많기는 했는데

그것 마져도

일본 팬들에겐 실례가 될 정도로

이종범은 일본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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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원래 축구선수가 꿈이었다

 

원래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며

실제로 축구부에서 활동을 했던 이력도 있었으나

학교 내 축구부가 없어졌고

동네 친한 형(?)

김기태의 영향으로 야구를 시작한 케이스.

후에 들려오는 소문으로는

축구실력이 뛰어나

여러 곳곳에서 인정을 받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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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달걀공포증(?)이 있다

 

학창시절, 간식이 무조건 달걀이었고

계속적으로 관리를

해주어야하는 직업상 하루에

30개씩 먹은

기억을 가지고 있어서

지금은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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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복면가왕에 출연한 적이 있다

날아라 병아리라는 네임으로

복면가왕에 출연했고

" 걸어서 하늘까지 " 라는 노래를 불렀고

" 기다리는 아픔 " 을 부르며

정체를 공개했다.

원래 판정단으로 녹화에 참여하려다가

급히 마음을 바꿔

노래를 직접 불러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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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이정후의 아버지이다

가장 핫한 국내타자 중 한 명인

이정후의 아버지이다.

매 시즌 연차별 연봉을 순차적으로

갱신하고 있으며

FA가 되면

가장 유력한 미래의 메이저리거로

꼽히고 있을만큼

계속 성장하고있는 선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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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KBO 최고의 라이벌 이종범과 양준혁

양신 양준혁과

바람의 아들 이종범은

KBO를 대표하는 역대 최고의 라이벌이자

최고의 타자라고 할 수 있다.

포지션이 다르고

이종범이 해외에서 뛰었던 시기가 존재하기에

직접적인 비교로

서로를 평가하는 건 의미가 없다.

분명한 건

두 선수 모두 역사에 남을

최고의 타자였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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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장나라 시구 사건은 다시봐도 아찔하다

2002 올스타전에서

시구로 당시 최고 인기를 자랑하던

가수 장나라가 시구했고

시타자로 나섰던 이종범이 

갑작스럽게 공을 받아쳐 장나라가 맞을 뻔한

아찔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문제는 그 후,

한 마디 사과없이 곧장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이종범의 태도...

글쎄....

아무리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으며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행동이다.

 

youtu.be/noXNl6VmH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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