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마이클 오웬 잉글랜드 유일한 발롱도르 수상자(Feat. 원더보이)

스포츠/축구

by Gugu_K 2020. 10. 26. 17:39

본문

반응형

원더보이, 잉글랜드 최고의 공격수 마이클 오웬

마이클 오웬

TV에서 처음 제대로 본 건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하프라인 근처부터

혼자 폭풍 드리블을 통해

터트린 득점.

 

.

.

.

 

어린 유망주가

월드컵에 미친듯한 득점으로

세계를 놀라게 했고

그는 리버풀로 돌아와

좋은 폼을 이어가게 되면서

 

리버풀과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공격수가 되었다.

 

.

.

.

 

잦은 부상과 함께

폼이 나름 빠르게 떨어진 편,

그럼에도 그가

보여준 임팩트는 굉장한 수준이라

지금도 잉글랜드의

공격수하면

오웬을 떠올리는 경우가 꽤 된다.

 

데이비드 베컴과 함께

한 때

잉글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 중 한 명.

 

 

 

 

 

 

 

 

 

 

 

2시즌 연속 득점왕, 3관왕 그리고 발롱도르

발롱도르까지 수상해버린 리버풀의 오웬

96-97시즌,

시즌 막바지에 1군 데뷔했고

2년차를 맞이하며

 

부상 당한

그 당시 팀의 간판이었던

로비 파울러를 

대신하여 팀의 주전이 되었고

환상적인 폼으로

 

리그에서만

36경기 18골을 포함하여

44경기 23골

기록하는 등,

그 해에 리그 득점왕 차지.

 

.

.

.

 

그 당시,

나이는 19살에 불과했고

놀라운 것은

이듬해에도 

득점 페이스를 이어갔으며

 

부상이 꼈음에도

30경기 18골을 기록하며

두 시즌 연속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

모든 경기 통합

40경기 23골을 기록하며

지난 시즌과 동일.

 

.

.

.

 

본격적으로

주전으로 활약한 지

4년차 시즌였던

00-01시즌에는

리버풀의 3관왕(UEFA컵, FA컵, 리그컵)

주역이 되며

 

46경기 24골

득점 페이스를 보이며

맹활약했고

 

결국 이 해에

발롱도르를 수상하게 되며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의 수상자가 되었고

지금까지도

유일한 수상자로 남아있다.

 

.

.

.

 

하지만,

챔스와 리그 우승에 대한

갈증이 있던

마이클 오웬은

이적을 결심했고

이미 슈퍼스타 공격수들이

즐비한 

레알 마드리드

이적하게 되면서

새로운 도전과 함께

열성적인 리버풀 팬들에게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빡빡이 레알 마드리드 시절

지구방위대 레알 마드리드 시절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오웬은

행복하지 못했는데

 

우선

레알에는

이미 최고의 공격수

호나우두와 라울이 존재했고

오웬은 자연스럽게

주전에서 밀리며

출전시간이 줄어들어갔다.

 

.

.

.

 

그럼에도

출전시간 대비

많은 골을 넣기는 했지만

레알의 아이콘 라울

지구상 최고의 공격수로 평가받았던

호나우두의 아성

넘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였고

결국 그 해에

36경기 13골을 넣으며

스탯상으로는

나름 준수한 활약을 했지만

 

결국 출전시간보장 

요구와 함께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며

다시 한 번 이적하게 된다.

 

.

.

.

 

공교롭게도

오웬은 챔스 우승을 위해

레알로 갔는데

그 해에 

챔스우승을 리버풀이 차지했고

 

다시 돌아갈

여지도 있었지만

리버풀 입장에서는 레알로 보낼 때

이적료의 두 배를

다시 지불하면서 그를

데려오기엔

부담감이 큰 상황 속,

 

그는 결국

뉴캐슬로 이적하게 되며

다시 EPL로

돌아오게 되었다.

 

 

 

 

 

 

 

 

 

 

 

 

잦은 부상, 먹튀의 그림자 뉴캐슬 시절

시작은 준수했으나... 점점 더...

4시즌

뉴캐슬에서 보냈지만

그가 출전한 경기는 고작 71경기..

 

처음 팀에 합류하여

리그 연속골을 기록하는 등

예전의 모습을

보여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잦은 부상이 이어지며

결국 폼을

회복하지 못했고

높은 주급은 먹튀라는 오명

쌓기에 충분했다.

 

.

.

.

 

뉴캐슬의 라커룸에서

그는 슈퍼스타라는 오만함(?)

가지고 있어서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의견도 존재했으며

 

결국 팬들도

그가 팀을 떠나자

오히려 홀가분해 했다는 후문.

 

.

.

.

 

FA가 되어

팀을 찾아 나섰지만

그를 영입하려는 구단이 없었고

속히 말해

발품을 팔아

본인에 대한 홍보

하고 다녔을 정도로 그에 대한

오퍼가 오지 않는 상황.

 

그 때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곳에서

그에게 구원의 손길

펼치게 된다.

 

 

 

 

 

 

 

 

 

 

 

리버풀 최대 라이벌 맨유로 이적

리버풀 팬에겐 제대로 뒷통수가 된 이적

그야말로 충격적인 이적.

리버풀 팬들에겐

더 충격적이고 배신감을

느낄 수 밖에 없는

극한의 상황.

 

.

.

.

 

이적을 살펴보면

퍼거슨 감독은

예전부터 오웬의 팬이였고

그를 영입하고 싶은

소망(?)을 간직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가 FA로

풀리자

식사자리를 만들어

영입에 성공.

 

.

.

.

 

반면,

리버풀 입장에서는

오웬 역시

FA신분으로써

친정팀으로 돌아가고 싶었고

제라드, 토레스

그 당시 리버풀의 주축 선수들 역시

그의 영입을 반겼지만

베니테즈 감독이

거절했고

그 상황 속,

오퍼가 들어온 맨유의

손을 잡은 것.

 

.

.

.

 

youtu.be/Tj8yzn0XjAw

이 한 골로도

오웬은 밥값은 톡톡히 해냈다고

말할 수 있다.

 

맨시티 더비에서

극적인 결승골을 넣으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고

누구보다 오웬스러운 득점을 올린 것이라

오웬 팬들에겐

더할나위 없는 하이라이트 필름.

 

.

.

.

 

오웬은

주전은 아니였지만

꽤나 많은 경기에 투입되며

쏠쏠한 활약

보여주기도 했고

 

결국 꿈에 그리던

리그 우승 타이틀을 따내며

맨유 이적은

개인적으로 비난도 많았지만

성공적이었다.

 

 

 

 

 

 

 

 

 

 

현역 마지막팀은 스토크 시티

극적으로 다음 행선지는 스토크 시티

이적시장이

닫히기 직전 그는 스토크 시티

유니폼을 입었고

 

예전 그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길 기대했던 팬들에겐

실망스러운 모습.

 

.

.

.

 

8경기에 뛰었으며

이색적으로

헤딩골로 득점하며

그 골이

스토크 시티 데뷔골이자 마지막 골

되어버렸으며

 

결국,

이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33세 나이였으니,

너무 이른 것이 아니냐는

의견들도 존재했지만

잦은 부상으로

이미 폼이 제대로 떨어진 그를

받아 줄 구단은

없었다.

 

 

 

 

 

 

 

 

 

 

 

 

국가대표로써의 마이클 오웬

최연소 주장에 이름을 올렸던 마이클 오웬

youtu.be/I4qeDBad2Go

마이클 오웬이

세상에 이름을 알린 득점으로

1998 프랑스월드컵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에서

기록했던 득점.

 

오웬은 U17, U19 대표로

이미 월등한

기량을 바탕으로

스티븐 제라드보다 더 빠르게

국대에 승선했고

 

월드컵에서의 활약으로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자리매김한다.

 

.

.

.

 

월드컵, 유로에서

각각 꾸준하게 득점을 올리며

활약했고

 

라이벌 독일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해줘야 할 때,

결정을 지어주는 공격수.

 

.

.

.

 

러시와의 평가전에서

2골을 넣으며

구 웸블리와 신 웸블리에서

모두 득점을 기록한

유일한 선수로 기록되었다.

 

.

.

.

 

2008년 3월,

평가전에 대표팀으로 뽑혔고

그 경기에

교체로 출전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고

그 경기가

오웬의 마지막 국대경기가 되었다.

 

A매치: 89경기 40골

 

 

 

 

 

 

 

 

 

 

 

 

마이클 오웬에 대한 TMI

 

 

 

 

01. 시뮬레이션으로 부당한 PK를 2번이나 받았다

 

시뮬레이션 플레이로

PK를 2번이나 받았다는 것은

어찌보면 선수생활에서

부득이하게 이룰 수 있는 수치라고 

볼 수도 있는데,

 

문제는 그 전제조건이

월드컵이고

상대가 동일한 국가라는 것.

 

1998년과 2002년

아르헨티나를 상대로 각각

PK를 얻어냈고

아르헨티나 팬들에겐

천하의 죽일 놈이 되었을 듯??

 

재밌게도

KFA(대한민국축구협회)

홈페이지에는

마이클 오웬의 이러한 행동이

대표적인 시뮬레이션 사례로

나온다는 것..ㄷㄷ

 

.

.

.

 

02. 대한민국 개고기 문화에 반대했다

 

2002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개고기 먹는 문화에 대해 반대하는

시위에 서명했고

 

그 당시,

국대 동료였던 에밀 헤스키와

사촌 동생인

제이미 레드넙 등이 포함.

.

.

.

 

03. 오웬의 어릴 적 응원 팀은 에버튼이다

 

에버튼과 리버풀은

전통의 지역 라이벌로써

지금까지 머지사이드로 알려져 있는데

 

재밌게도 리버풀

유스 출신의 마이클 오웬은

어릴 적 부터

에버튼의 골수팬이였다는 것.

 

여담으로

역시 리버풀의 전설적인 존재

제이미 캐러거 역시

원래는 에버튼 팬이였다고 한다.

 

.

.

.

 

04. 재테크의 달인, 알아주는 경마 매니아

 

선수 시절부터

경마, 부동산, 주식 등

재테크에 열심히였고 결국 그러한 노력으로

데이비드 베컴에 이은

잉글랜드 축구계 자산 2위라는...ㄷㄷㄷ

 

경마에 흥미가 있어서

말 타는 걸

정말로 좋아해서

일부 지역을 사서 그 곳에서

말을 타기도 하고

역시 경마를 좋아하는 

퍼거슨 감독과

사적으로 잘 통한다는 후문.

 

.

.

.

 

05. 전설 펠레가 아끼고 좋아하던 선수였다

 

펠레는 마이클 오웬에 대한

애정을 여러 번

인터뷰를 통해 드러낸 바 있으며

자신이 뽑은

축구인 125인에도

오웬은 이름을 올렸다.

 

펠레의 저주인거니...?

 

.

.

.

 

06. 전형적인 유리몸, 축구게임에도 반영 될 정도였다

 

오웬의 가장 큰 장점은

월등한 스피드와

공을 가진 상태에서도 그 스피드가

유지되어 득점을

만들어내는 유형의 선수라는 것.

 

다만, 선수생활 내내

잦은 부상에

시달렸고

폼이 돌아올만 하면

항상 부상크리가 터지곤 했던....

 

실제 위닝/피파에서도

그러한 오웬의

특성이 제대로 반영되어

스피드는

최고치를 찍고 있지만

유리몸은 벗어날 수 없었다는 후문.

 

.

.

.

 

07. 잉글랜드 국적 최후의 발롱도르 스타

 

지금까지도

잉글랜드 국적 최후의

발롱도르를 수상한 선수로 이름을 올렸고

무엇보다

2001년 수상이라

20대 초반의 나이였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슈퍼스타와 천재성을

동반한 선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