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을 대표하는
미드필더로 평가받고 있으며
그가 남긴
A매치 기록을 보면
여느 공격수보다
탁월한 득점력을 가졌던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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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리어에서
너무나 많은 2위를 기록해
국내 팬들에게
가지고 있으며
레버쿠젠, 바이에른 뮌헨
그리고 첼시에서
활약하며
큰 무대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고
2002 한일 월드컵
국내 팬들에겐
애증의 선수이기도 하다.
처음엔 2군으로
시작했다가
후반기에 콜업되어
레버쿠젠과의 리그 경기를 통해
분데스리가 데뷔.
데뷔한 시즌에
바로 우승 경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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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곧장 주전 미드필더가 되어
활약이 좋았으며
챔피언스리그도 경험하며
8강까지 올랐고
바이에른 뮌헨에게 패하며
아쉬움과 함께
더 큰 클럽으로 이적을 꿈꾼다.
전 소속팀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다면
레버쿠젠에서는
좀 더 공격적인 롤을 부여받아
기량이 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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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메르송, 베르바토프,
제 호베르트 등
세계적인 선수들과
좋은 호흡을 이루며 팀을 이끌었고
말 그대로
이 때가
01-02시즌은
발락에게는 잊을 수 없는
시즌이 되었고
모든 대회 통틀어
하지만,
챔스결승에서
지단의 역사적인 발리슛을
맞아 패하는 등,
이 해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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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락은
그 욕심은
다시 한 번
그를 이적시키게 만들었는데
그 당시,
레알 마드리드와 바이에른 뮌헨을
두고 고민하다가
2006년 자국에서 월드컵이
열릴 것을 대비해
(나중에 후회했다는 후문..?)
미하엘 발락이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면서
그 시기에
분데스리가는
뮌헨은
챔스에서도 빠르게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우승에
실패하면서
발락은 망연자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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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다른 팀에서 그에게
제의가 오는데
바르셀로나는
실제로 발락을 거의 영입하는
분위기였지만
뮌헨측에서 요구하는
이적료가 너무 컸기때문에
엎어졌고
다시 팀에 남은
미하엘 발락은 결국
꾸준한 활약을 했지만
지속되는 챔스우승에 대한 갈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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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기간을
1년 남겨두고 뮌헨은
지속적으로
재계약 의사를 내비쳤지만
좀 더 편하게
다른 팀으로 이적하고 싶었던
발락은 거절했고
결국 이적료없이
이적할 수 있는 발락에게
유리한 상황에서
그를 영입하고자 뛰어든
첼시와 맨유 중,
첼시에서의 발락은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독일리그에서 보여주었던
폼이나 롤에 비해
첼시에는
팀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들이 이미 존재했고
발락은 거기서
같이 묻어가는(?) 정도라고
표현하긴 애석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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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8시즌,
박지성이 챔스에서
환상적인 활약을 펼치고도
결승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던 시즌이기도 했던
바로 그 시즌,
첼시는
리그와 챔스 그리고 컵대회에서도
준우승을 차지하며
발락 개인에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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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시 감독으로
히딩크가 사령탑에 오르며
발락은 폼을 찾고
제자리에 앉았다는 평가.
발락에게
오히려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부여하고
공격적인 마무리가 뛰어난
램파드를
공격형으로 쓰면서
중원의 조율을 가져간 것.
이것은
첼시의 상승세와
발락의 폼을 살리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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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첼시에서도
챔피언스리그 우승의 꿈은
이루지 못했고
설상가상으로
컵대회에서 부상을 당하며
월드컵 사나이로
불리던 발락의
2010년 남아공월드컵 출전 역시
불발이 되는 순간.
그 시기와 맞물려
팀 개혁에 나섰고
발락은 팀에 남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자신은 최소 2년 계약,
팀은 1년 계약 및 추후 협의로
갈등을 빚었고
결국 그는
자존심을 선택하며
레버쿠젠으로 돌아가
팀의 중심으로 나아가고 있는
토니 크로스 등
어린 선수들에게
쏠쏠한 활약.
하지만,
이미 30대 중반의
나이가 되었고
또 다시 부상으로 쓰러지게 되면서
결국 폼을 찾는 데
어려움을 느꼈고
리그에서도
도르트문트에게 결국
우승을 내주며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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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시즌을
마지막 시즌의
챔피언스리그에서는
바르셀로나에게
1:7의 대패를 기록하는 등,
아쉬움을 남겼다.
(발락은 부상으로 출전하진 못했다.)
유로2000부터
본격적으로 국대에서 활약했으며
2002 한일월드컵
유럽예선에서
본선진출 실패 위기에 놓인
2002 한일월드컵에서
8강, 4강에서
나름대로
암흑기였던 독일 대표팀에서
클로제와 함께
밥값을 제대로 하던 선수가 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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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표팀은
그 후로
제대로 암흑기를 맞이하는 데
메이저대회 진출조차
힘들 수 있는
전력을 꾸린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팀을 본선으로 이끈 선수 역시
미하엘 발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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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으며
센츄리 클럽에
단, 2경기만 남겨놓은 상황에서
예우차원으로
그를 국대에 차출하며
배려하자,
필요에 의한 것이 아닌 것은
의미가 없다며
결국 그의
A매치 출전 경기수는
98경기에 멈추게 되었다.
은퇴 후, 개인 트위터 계정을 통해
그는 첼시의
모든 경기를 시청한 뒤
코멘트를 남기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우스갯 소리로 첼시 팬들에겐
이미 그는
첼시 앰버서더로 불린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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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월드컵 당시,
본선은 일본에서 치른 후에
16강부터는 한국에서
경기를 치르게 된 발락과 독일 대표팀.
그는 입국 후
인터뷰를 통해
단 한 마디로 한국 팬들을 사로잡았다.
" 이 곳이 바로 차붐의 나라입니까? "
꼭 와보고 싶었다며
나에겐 차붐은 우상이었다며
이 발언으로 인해
차범근 감독에 대한 평가는
다시 한 번 높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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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에른 뮌헨 시절,
동료였던 렐의 그녀와 불륜을 저질렀고
그나마 발락이
조금은 억울할 수 있는 건
렐의 그녀는
그 외에도 다른 선수와도
불륜을 저질렀던 것.
그나마 발락은
일시적은 원나잇이라는 이유였을까?
언급조차 많이되진 않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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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다.
A매치 98경기에 나와서
42골을 넣었으니,
그는 왠만한 공격수 이상으로
득점력을 보여주었고
그가 얼마나 높은
득점력을 보여주었는 지는
독일의 레전드들과
비교해보면 알 수 있는 데
위르겐 클리스만이
108경기 47골,
루디 퓔러가
90경기 47골,
그의 국대 득점력은
가히 최고의 레전드 스트라이커급의
활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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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전성기 시절의
미하엘 발락은
미드필더 어느 곳에 놓고 뛰어도
최고의 기량을 발휘했다.
전성기 시절,
독일에서 공격형 미드필더를 맡았고
첼시와 막판 레버쿠젠에선
수비형 미드필더 역할을 수행했으며
때론 윙어로도 나와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했으니,
감독이 이뻐할 유형의 선수.
더불어 그는
영리함까지 갖추어
좋은 패스와 함께
스스로 오프더볼 움직임을 기가막히게
가져가는 선수였는데
거기서 피지컬까지 좋았으니....
대체불가....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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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히 폼을 끌어올려
레버쿠젠에서 더 큰 무대로
나아갈 시점,
그에게 손을 내민 구단은
바이에른 뮌헨과 레알마드리드 였는데
고민하다가 독일 월드컵이
곧 열릴 것이라는
그 의견때문에 뮌헨을 선택.
후에 인터뷰를 통해
그 선택에 후회까지는 아니더라도
레알로 갔다면
여러가지로 흥미로운 상황들이
만들어졌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현한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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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과 비슷한 형태로
독일 역시 서독과 동독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발락이 바로 동독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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