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적
등번호 11번이 가장 잘어울리는
1994 미국월드컵
스페인과의 경기에서 극적인
동점골의 주인공이자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도쿄대첩의 발판을
만들어내는 헤딩골의 주인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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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히
지금과 같은 환경과 상황이었다면
보다 더 높은 곳에서
많은 활약을 하며
역대급 선수로 충분히 남을 수 있는
기량을 지녔으며
말년에
백전노장이 되어서
변방리그로 불리는 곳이기는 하지만
멋지게 은퇴한 선수.
1992년
안양 LG 유니폼을 입으며
K리그 데뷔.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환상적인 활약과 함께
최고의 명문구단들이
러브콜을 보냈으나
이루어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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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올림픽대표 감독이었던
크라머가
서정원의 가치와 가능성 그리고 실력을
알아보고 무조건 그를
독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끝내 LG에서는
팀의 에이스이자 미래인
서정원을
놔주지 않았고
그 후에도
1997년 포르투칼 벤피카에서
서정원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고
심지어 그를
콜업하여 함께 훈련을 하는 등
이미 이적이
확정되는 분위기였으나
이번에도 구단과 차범근 감독 등
여러가지 이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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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LG 소속 중
상무에 입대하여 병역의무를 해결했고
1997년이 되어서야
벤피카 이적 실패 후,
프랑스 리그 진출을 이뤄낼 수 있었고
이 때의 이적 역시
소속 구단에서
파격적인 이적료를 제시했기에
LG가 수긍한 부분.
당시 11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스트라스부르 이적.
무엇보다 이 시기엔
엄청난 경쟁력.
서정원은
이적 후, 데뷔전에서
데뷔골을 기록하는 등 환상적인
활약을 보여주었고
첫 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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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소속팀은 서정원에게
등번호 11을
부여하는 등 에이스 대접을 했고
팬들의 인기도
점점 더 올라갔으나....
감독이 바뀌고
뛰게 하지 않았고
결국 서정원은 부당한 이유로
시즌 전체를
벤치에서 날려야 했으며
본인 스스로
타 팀으로 이적을 해서라도
유럽에서의
선수생활을 하고 싶었으나
그것마져
쉽게 연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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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서정원은
좋았던 출발과는 다르게
어이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서
유럽생활을
정리하게 되었고
프랑스 리그를 나오며
여러 팀에게
추가적으로 오퍼를 받았으나
에이전트의
안일한 대처로 인해
그것마져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결국, 국내로 리턴하는 과정에서
언제든지
유럽무대를 원하면
길을 열어주겠다는
1년 후,
유럽 진출을 약속하며
새롭게 입단한 수원 삼성.
이 과정에서
그의 전소속팀 안양 LG는
그에게
마지막까지 구차하게 굴었고
결국 법은
LG의 편을 들어주며
이적료의 해당하는 금액을 구단에게
뱉어야 했던 서정원.
뒤에
더 자세하게 설명하겠지만
LG -> FC서울의
이러한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대우와 마찰은
보다못한 서정원이
직접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그러한 행태를
속속히 밝힌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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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로 돌아온 서정원은
본인의 클래스가
다르다는 걸 경기력을 통해 입증하며
수원의 승리를 이끌었고
폼이 절정으로 좋던 시기,
전남과의 경기에서
부상을 당하며 그라운드에 쓰러졌고
재활기간에
추가적인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본인의 폼도 떨어지거니와
기다렸던
유럽진출에 대한 꿈도
점점 더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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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복귀했지만
부상의 여파로 폼이 떨어졌고
스피드로 먹고살던
서정원의 장점은 십자인대 부상으로 인해
많이 감퇴되면서
기량이 떨어졌다는 평가까지
듣기 시작했는데
그럼에도 그는
꾸준하게 다시 반등했고
2001 시즌
부활을 알리며 자신의 클래스를 보여주었고
30대 노장이 되었으나
어린 선수들에게
실력/체력적으로 밀리지 않으며
수원 왕조를 이루는 데
주역이 되었으며
2004 시즌
다시 한 번 리그 우승과 함께
유종의 미를 거두며
오랫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유럽진출.
이적을 선택했다.
모두가
은퇴를 권유하는 시기에
12경기 2골로
활약상을 보여준 후,
그 해
리그 승격팀인 SV 리트에서
서정원에게
끈질긴 러브콜을 보냈고
결국 서정원은 구단과 감독이 직접
자신을 찾아와
설득하는 것에 감동하여
이적을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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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즌,
주역으로 활약하며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했고
오스트리아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분데스리가 팀들도
그에게
러브콜을 보냈으나
서정원은
37세의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였고
코치를 생각하고 있었기에
정중히 거절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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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리그 무대에서
오히려 지금보다
유럽 리그에서도 훨씬 더
경쟁력이 높았던
오스트리아 리그에서의 활약이었기에
서정원이 더욱더
대단하게 여겨지는 대목.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서
여러 임팩트있는 득점과 활약을 보여주며
서정원이란 세글자 이름을
제대로 각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대표로
첫 태극마크를 달았고
1994 미국월드컵에서도 뽑혔으며
스페인전에서
후반 추가시간에
맹활약했다.
이 골은
이 때의 활약으로
유럽 여러 빅클럽들에게
러브콜 및 관심을
제대로 받기도 했는데
서정원은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에서도
0:1로 끌려가던
후반에
최용수의 헤딩 패스를 받아
도쿄대첩 2:1 역전승의
기틀을 마련.
1998 프랑스 월드컵에는
노정윤과 함께
팀의 최대 에이스로 평가 받았지만
출국을 앞두고
수두에 걸린
아들을 안아주며 달래주다가
본인도 수두에 걸려
결국 월드컵에 따로 격리되어 비행기를 타고
참여했으며
정상 컨디션이 아니라
부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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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2002 한일월드컵
엔트리 가능성도 높게 점쳐지기도 했으나
부상 회복 등 이유로
구단에서
히딩크 감독에게
서정원 발탁을 자제해달라고 말했고
결국 서정원은
더이상 월드컵 무대 및 국대에서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자신의 몸을 해치는 것이라면
혹은 선수생활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이라면
아예 금지시 했던 선수로
자기관리의 대가로 알려졌다.
술, 담배는 물론
지금까지도
탄산음료조차 마시지 않는다...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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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
예선이 모두 끝난 후,
서정원의 기량을 유심히 지켜보았던
바르셀로나 구단이
그에게 공식적으로 오퍼를 넣었고
군문제로 좌절...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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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시즌을 앞두고
K리그는 각 감독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제출하라고 말했으며
서정원은
당당하게 좋아하는 아이돌로
트와이스를 기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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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시절,
친정팀 안양을 상대로
K리그 역사에
남을만한 역대급 오버헤드킥 골을
작렬시킨 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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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원은 미국월드컵 당시,
상무 소속이었고
그 당시 병장 월급이 9,000원...ㄷㄷㄷㄷ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역시 상무 소속이었던 이근호가 골을 넣으며
최저연봉의 득점이라
언론에서 말했던 기억이 있는데
물가를 반영해보면
서정원이 최저연봉이 맞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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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협회와 차범금 감독의
욕심만 아니었다면
서정원은 벤피카로 이적할 수 있었고
그의 축구 인생도
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
끝내 서정원에게
국제이적동의서를 내주지 않아
벤피카와 훈련도 함께하고
9번과 서정원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까지 만들었으나
결국 합류하지 못했다.
벤피카 구단 박물관에는
서정원의 유니폼이 전시되어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2019년, 서정원은 그 곳에 직접 방문하여
자신의 유니폼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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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무대를 정리하고
국내로 리턴을 준비하는 기성용의
발목을 잡은 건
다름아닌 원 소속팀 FC서울.
기성용은 본래
FC서울로 복귀를 생각하고 있었으나
구단에서는
말도 안되는 터무니없는
연봉을 부르며
그를 오히려 자극했고
그가 전북과
이적을 논의하려고 하자
법을 내세우며
그의 앞길을 막아버렸다....
그리고...
조금은 다른 형태이지만
결과적으로
다를 바 하나없는
서정원의 유럽진출 과정에서도
구단은 욕심을 부리며
그를 놓아주지 않았던 사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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