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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안 세바스티안 베론 한때 세계 4대 미드필더(Feat. 맨유에서의 먹튀)

스포츠/축구

by Gugu_K 2021. 3. 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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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미드필더로 꼽혔던 전성기 시절

아르헨티나 국적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며

킬패스하면 떠오르는 선수.

 

세리에A에서

1차 전성기를 보낸 후,

당시 EPL 최고 이적료를 자랑하며

맨유 유니폼을 입었으나

기대이하의 부진으로 먹튀 소리를 들은 바 있으며

그 후, 다시 세리에A 돌아가

나름대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으며

꽤나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했던 선수.

 

한때

베컴, 지단, 피구와 함께

세계 4대 미드필더로 불리곤 했던

선수이기도 하다.

 

 

 

 

 

 

마라도나와 함께 뛰었던 자국리그

감독과 선수로도 후에 만났다

1993년 

자국 아르헨티나 리그에서

유스생활을 시작했고

1995년 프로데뷔와 함께 2부리그였던 팀을

1부리그로 승격시키면서

자국리그 명문구단

보카주니어스로 이적하게 되었다.

 

그 곳에서

우상과도 같은 존재

마라도나와 팀을 이루어 활약하기 시작했고

17경기 3골의 스탯과 함께

유럽 스카우터들에게

관심을 받더니

바로 이듬해

세리에A 삼프토리아로 이적하게 되면서

유럽무대 도전에 나서게 된다.

 

 

 

 

 

 

 

첫 번째 전성기, 세리에A 시절

화려했던 라치오 시절의 멤버들

삼프도리아에서

주전으로 두 시즌을 활약하며 

주가를 높였고

1,500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발생시키며

파르마로 이적했다.

 

칸나바로, 튀랑, 크레스포 등

당시 화려했던

파르마의 일원이 되어

코파 이탈리아와 UEFA컵을 모두 우승했으나

정작 리그에선

성적이 6위에 그치게 되었고

바로 이듬해

다시 한 번 이적하게 되면서 팀을 옮겼고

바로 라치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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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라치오

막강한 재력을 바탕으로 두터운 선수층

보유하고 있는 구단이었고

선수 면면도 화려.

 

네드베드, 크레스포, 시메오네,

네스타, 만치니 등

슈퍼스타들이 가득했고 베론 역시 그 곳에서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

99-00시즌

팀의 리그 우승과 함께

본인은 리그에서 21개의 어시스트를 배달하며

최고의 미드필더로

전성기를 구가.

 

허나, 남미 선수들의

가짜 서류 사건이 세리에A를 강타했고

베론은 무혐의를 받았으나

깍인 이미지는

이탈리아 언론의 먹잇감이 되어

계속 까였고

신물을 느낀 베론은

마침 라치오의 재정난까지 겹치게 되면서

이적을 도모했고

당시 EPL 최고 이적료를 발생하며

맨유로 이적하게 되었다.

 

 

 

 

 

 

먹튀의 시간, EPL 무대

플레이 스타일과 리그가 맞지 않았다는 분석

베론이 가장 부진했고

먹튀라는 소리를 들었던 시기.

2,800만 파운드로

당시 EPL 최고의 이적료를 갈아치우며 

맨유 유니폼을 입었고

그만큼 그에게

기대하는 바가 컸으나

결론적으로 말하면 최악의 부진.

 

시즌 초에는

좋은 폼을 보여주며

9월 이달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주가를 높이는 듯 했으나

 

우선적으로 맨유에는

같은 포지션에 폴 스콜스라는 존재가 있기에

베론은 조금 더 수비적인 롤

부여받기 시작했고

자신에게 맞지않은 옷을 입은 듯

조금씩 부진에 빠지며

베론은 서서히 폼이 떨어졌다.

 

팀원들과

불화설에 휩싸이는 등

여러가지로 풀리는 것이 없던 베론은

그를 데려왔던

퍼거슨 감독이 언론에 대놓고

" 베론 중심으로 전술을 짜서 선보이겠다 "

공표까지 했으나

결국 이적을 선택하게 되면서

로만 구단주가

구단을 인수하며 슈퍼스타들을 모으고 있는

첼시로 갈아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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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에서는 더욱더 최악.

부상 때문에

경기 출전 자체가 거~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세리에A를 주름 잡았던

베론의 모습은

EPL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그의 부진으로

EPL >>>>> 세리에A

인식이 생겨날 정도가 되었으며

EPL 구단들도

남미 선수들을 영입하는 걸

다시 한 번 생각하거나 꺼려하는 구조가 

생길 정도로

베론의 부진은 여러가지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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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에

베론의 EPL 부진에 대해서

일단 그가 원하는 중앙 미드필더나 공격형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것

가장 큰 부진의 배경으로 꼽았으며

리그 자체가

베론과 맞지 않았다는 

분석도 존재했다.

 

 

 

 

 

 

부활의 세리에A 복귀, 그리고 은퇴

마지막은 자국리그에서

첼시를 떠나

임대로 인터밀란 유니폼을 입으며

세리에A에 복귀했고

거짓말처럼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더니

주전으로 꾸준히 나서며

맹활약 시전.

 

스탄코비치, 캄비아소와 함께

매서운 중앙라인

형성하며 

리그와 컵대회에서 인터밀란의 우승을 안기며

최고의 자리에 섰고

인터밀란은

무려 7년만에 무관에서 벗어난

시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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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을 끝으로

계약이 만료되자 그는 고국으로 돌아갔고

고향팀에서

리그 우승과 함께

클럽월드컵에도 출전하게 되면서

결승전에서

메시가 이끄는

바르셀로나를 상대하기도 했으며

아쉽게 패배.

 

제 2의 전성기와도 같은 활약으로

2008~2009년

두 시즌 연속으로

남미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고

2013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허나!!

 

고향팀에 회장으로 임명된 후

2017 시즌을 앞두고

시즌권을 65%이상 구매하면 

현역복귀를 고려하겠다 공약을 걸었고

실제로 그 일이 이루어지자

정말 현역으로 복귀했다 :)

 

 

 

 

 

 

국가대표로써의 베론

국대에서는 운이 없는 편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어시스트 3개를 기록하며 주가를 높였다.

그러나 2002 한일월드컵에서

부진했고

2006 독일월드컵에선

엔트리에서 아예 제외가 되는 충격.

 

2010 남아공월드컵도

엔트리 제외를

모두 예상했으나 당시 인연이 있던

국대 감독이 마라도나라

그를 데려갔고

마라도나의 이해 할 수 없는 전술의

수비형 미드필더

뛰었으나

본선 첫 경기에서

부상으로 쓰러지며 대회를 마감했다.

 

A매치 73경기 9골

 

 

 

 

 

베론에 대한 TMI

 

 

01. 선수시절, 별명은 " 작은마녀 " 였다

 

베론의 아버지도

선수 출신으로 마녀라는 별명이 있었고

그의 아들 베론은 

아버지의 영향으로 자연스럽게

이러한 별명을

가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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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싶어했다

 

삼촌도 축구선수였는데

현역 때, 잉글랜드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뛰었던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본인도

EPL에서도 뛴다면

셰필드 유나이티드에서 뛰겠다고

다짐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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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아드리아누와 불화가 있었다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한

인터밀란 시절, 그는 더 오랫동안 팀에 남아서

활약을 하려고 했으나

당시 팀에 있던

말썽쟁이 아드리아누와 불화가 있었고

결국 재계약없이

조국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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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 21개의 어시스트가 더 위대한 이유는?

 

99-00시즌

라치오 소속으로 베론은

리그에서 21개의 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맹활약했는데

이 기록이 더 위대한 이유는

당시 세리에A는

어시스트의 기준으로 원터치만 인정했던 것.

지금과 같은 기준이라면

30개도 넘게 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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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 퍼거슨 감독 애증의 선수이다

 

퍼거슨 감독은

베론이 맨유를 떠날 때에

그를 다른 포지션에서

써보았으면 더 낫지 않았냐는

언론의 질문을 받았고

퍼거슨은 거칠게 답변했다.

 

" 그 놈은 원래 지 마음대로 하는 놈이라,

어디에 뛰었어도 멋대로 했을거다. "

 

하지만, 애정은 있는 지

베론이 부진하다가 폼을 찾고

다시 부진하는 등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며

언론에서 그를

계속 까내리자 다시 한마디 했다.

 

" 이 XX한 새끼들아, 베론은 위대한 선수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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