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중 한명이었고
최용수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시기는
무수한 골을 넣었고
말 그대로
아시아팀을 상대로
무서운 존재가 되었으며
발군의 제공권과 헤딩을 바탕으로
별명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며
그 때에
세레모니 과정에서
전광판에
걸려 넘어지는 헤프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
선수이기도 하며
은퇴 후에도
감독으로써 커리어를 쌓으며
클래스를 보이는 중.
다른 국대 선수들과 달리
아마추어 시절에
그다지 포커스를 받지 못한 편.
연세대 출신으로
투톱을 이루던 선배가
김도훈이었는데
아무래도 그에게 포커스가 짙었으며
최용수는 뭍어가는 정도?
.
.
.
하지만,
자신의 가치와 득점력을 보였고
차지하며 K리그에 연착륙.
굉장히 이른 나이에
군복무를 수행한 편이였으며
다시 돌아와
K리그를 대표하는
공격수로 성장하게 되는데
이 때에 한 팀이었던
이영표의 기억은
전술이 무조건 최용수에게 공을
전달하여 득점하자
였다고 한다.
.
.
.
2001년에
이 때에 이적료가 당시
국내선수로써는
가장 많은 금액으로 알려졌으며
군복무가
맞물려 있던 시기에는
관심을 보여
실제 영국으로 건너가
입단 테스트를 받은 바 있으며
본인도 모르는
어떠한 이유로 이적에는
J리그의 첫 팀은
첫 시즌에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보여주었으며
과거의 인터뷰를 살펴보면
초반에는 패스가
거~의 오지않는 등
텃세 아닌 텃세와
적응에 애를 먹은 편이었지만
딱 한 골이
터진 후,
모든 것이 순조롭게
풀렸다고 말한 적이 있다.
.
.
.
2002 한일월드컵
이후에도
제프 유나이티드에서 맹활약했고
총 3년간 뛰었으며
한 경기 6골을
넣는 등,
최고조의 컨디션을 보였으며
그 후
1년간 교토상가에 임대되었고
주장을 맡은 등,
팀 내 최다득점자가 되었지만
팀이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아쉬운
시즌이 되었다.
.
.
.
2015년,
깊은 부상으로
이렇다 할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그의 주빌로에서의
성적은
어느정도 나이가 들었고
폼이 떨어지는
시점에서
더 이상 일본에 머무르지 않고
한국으로 돌아와
선수생활을 정리할 준비에 들어간다.
사실상 국내 복귀는
그가 코치로 가기위한 과정이었고
LG치타스의
바뀐 FC서울로 복귀해
한 시즌 동안
리그에는 2경기 출장.
일본 J리그 팀과의
연습경기에서
공식 은퇴식을 갖으며
깔끔하게 은퇴했다.
1995년 처음으로
국대에 승선한 최용수는
1996 애틀란타 올림픽 멤버가 되어
기대감을 높였지만
와이들카드로 뽑힌
황선홍에게
어느정도 묻히며
출전시간도 높지 않은 편.
.
.
.
그의 국대로써의
최고의 전성기는 1997년 시기,
최용수는 차범근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주전 공격수로 활약하며
기록하며 맹활약했고
월드컵 진출을 확정 짓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선
멕시코 전
결장에 이어
나머지 2경기에서도
부진을 면치 못하며
월드컵에 득점은 이루지 못했다.
(2002년에도 실패)
.
.
.
히딩크호에 합류하여
2002 한일 월드컵에도 출전했지만
미국전 일명
독수리슛을 쏘는 등
득점을 이뤄내지는 못했다..ㅎ
.
.
.
2003년
같은 시기에
황선홍에게 묻힌 느낌이
강하기는 했지만
숙명의 일본전에서 특히 강했고
월드컵 예선에도
임팩트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국가대표로써도
충분히 레전드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공격수로 기억된다.
지금은 교류가 적은 편이지만
90년대 당시에는
같은 구단 스폰서를 둔
구기 종목 선수들은
교류도 많고 친하게 지내는 편이라,
같은 LG 스폰서를 둔
야구선수 서용빈과 친분이 있고
서로의 경기를
관전하는 등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낸다고 알려졌다.
.
.
.
꼰대라는 표현은
어느정도 우스갯 소리이고
국가대표 시절,
최용수와 안정환은 꽤나 여러 번
같은 방을 썼고
족발 심부름 등을 포함해
선배 최용수가 엄청나게 안정환을
부려먹었다는 일화를
라디오스타를 통해 밝힌 바 있다..ㅎ
.
.
.
유달리 일본에게 강했고
J리그 시절에
무수한 득점력을 보였기 때문일까?
일본에서 만드는
유명 축구게임 위닝일레븐
시리즈에서
그 시절, 유달리
최용수의 능력치가 좋은 편이라
한국 게임유저들이
최용수 덕을 많이 봤다는 후문..ㅎㅎ
.
.
.
2018 아시안게임 때
해설위원으로 활약한 바 있으며
말 그대로 활약이어서
그의 솔직하고 담백한 해설이
이슈가 되면서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기도 했다.
.
.
.
국대에서도 10번을 달았고
왠만해선 소속 팀에서도
10번을 고수했는데
J리그 생활을 정리한 후,
FC서울로 복귀가
확정된 뒤
이미 소속팀엔 에이스 박주영이
10번을 달고있자
굉장히 아쉬워했다는 후문.
2020/10/14 - [스포츠/축구] - 고종수 왼발 마스터, 불명예스러운 비운의 스타
2020/10/14 - [스포츠/축구] - 유상철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 멀티 플레이어
2020/09/25 - [스포츠/축구] - 이영표 꾀돌이 대한민국 역대 최고의 풀백
2020/09/25 - [스포츠/축구] - 이천수 독보적인 이슈메이커 & 축구천재
2020/09/24 - [스포츠/축구] - 안정환 대한민국 최고의 판타지스타
2020/09/09 - [스포츠/축구] - 박지성 세 개의 심장을 가진 남자, 대한민국 슈퍼스타 커리어
설기현 설바우도 유럽파 성공의 좋은 예(Feat.설통수) (2) | 2020.10.16 |
---|---|
차두리 차범근 아들의 삶, 차미네이터의 고속행진 (0) | 2020.10.15 |
고종수 왼발 마스터, 불명예스러운 비운의 스타 (0) | 2020.10.14 |
맨유 카바니 1+1계약, 묵직한 공격수 보강 성공 (0) | 2020.10.06 |
토트넘 맨유 6:1 대승, 손흥민 멀티골 햄스트링 마법 (0) | 2020.10.05 |
댓글 영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