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국적
FC서울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고
스트라이커로써
기록하는 등
18년간 활약하며
최근에 은퇴한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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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월드컵 당시,
고등학생 신분으로 히딩크 감독에게
발굴되어 연습생 신분으로
같이 참여 했으며
K리그에서
좋은 활약을 바탕으로
프랑스 무대를
누빈 경험도 가지고 있는 그.
청소년 대표부터
지금은 이름 거론이 조심스러운
최성국과 함께
공격을 이끌며 특급 유망주로
평가 받았으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연령별 대표를
모두 거치면서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던 그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2002 한일월드컵을 벤치에서 지켜보며
꿈을 키워나갔고
같은 해
카타르에서 열린
아시아 청소년 대회에서
결승전
우승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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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지금의 FC서울이 된
안양 치타스에 입단하게 되면서
첫 해에
1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듬해에도
리그에서 8골을 기록했고
FA컵에서
공동 득점왕에 오르는 등
지속적으로
쑥쑥 성장세를 보이며 활약.
박주영이
팀에 새롭게 가세하면서
중요도가
조금 낮아진 느낌을 주기는 했으나
그가 프랑스로 떠나면서
정조국은
다시 주전으로 활약.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선수는
찰떡 호흡을 자랑했고
확실히 정조국은 원톱에 섰을 때 보다
자신과 호흡이 맞는
공격수와
투톱을 이루었을 때
그의 장점이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스타일이었고
리그에서 14경기 무패행진의
주역이 되는 등
폼이 점점 더 올라갔는데
국대 승선도
확실했으며 특이 이 시기가
2010 남아공월드컵을
앞두는 시점이라
스스로 기대감도 컸는데
경기 도중
팔꿈치에 제대로 맞아
광대뼈가 함몰되는 부상을 당하게 되면서
꽤나 오랫동안
그라운드를 이탈했고
국대 승선도
확실하진 않은 상황이었으나
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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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월드컵 진출의 실패를
맛보게 되었으나
2009년
인생의 또 하나의
시작을
알리기도 했으며
결혼 후,
확실히 더 안정감을 가지고
경기력도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FC서울에서의
꾸준했던 활약을 바탕으로
2010년,
오세르에 입단했으며
등번호는 24번.
무난하게 데뷔전을 치른 그는
조금은 늦은
5월에 데뷔골과 함께
유럽진출 이후,
처음으로 득점포를 가동했고
이 해에
시즌을 마감했으며
스탯은 너무나도 아쉬웠지만
전체적인 경기력은
좋았다는 평가가 지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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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2 시즌은
낭시로 임대를 가게 되었는데
자신을 영입했던
페르난데스 감독이
그 곳 감독으로 부임하게 됨에 따라
같이 간 케이스로
감독이
확실히 정조국의 경기력을
마음에 들어 했나보다.
결국 이 해에
낭시에서 활약하면서
2골을 기록.
만족할만한 성적은 아니였고
임대기간이 끝나
기존 소속팀이었던
오세르로 복귀 후,
병역의무를 수행해야함에 따라
소속팀과
계약을 해지한 후
다시 국내로 돌아왔다.
친청팀으로 돌아와
화려하게 인사했고
그 전까지
슈퍼매치에서 7연패를 달리던
FC서울에게
연패를 끊어주는
귀중한 득점이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값진 득점.
나름대로
꾸준하게 활약을 했으며
그 해에
유종의 미를
거두게 되면서
경찰청에 입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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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청 입단과 함께
K리그 챌린지 무대에서 뛰게 되었으며
2시즌간 활약하며
준수한 활약.
그 후,
다시 FC서울로 돌아왔으나
생각보다
폼이 좋지 못했고
추가로 영입된 선수들의 활약이
좋아짐에 따라
주전경쟁에서 밀렸으며
그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필요해보였다.
광주로 이적하며
꾸준하게 활약하기 시작했고
득점포도
조금씩 쌓아가면서
7월, 소속팀
티아고가 이적하면서
본인이 공격역할이 강해졌으며
14호골을 기록하며
개인 스스로
한 시즌 최다득점 경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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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는
득점포를 추가하면서
포항 스틸러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추가시간 극적인 동점골을 터트리며
광주의 K리그 클래식
잔류를 이끌며
구세주 역할까지 톡톡.
리그 막판
20호골까지 터트리며
결국 이 해에
시즌 후,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선수들을 대거 영입하면서
전력을 꾸리던
강원이 정조국을 영입했고
첫 시즌에도
출전대비 좋은 활약을 펼치며
팀을 이끌었으나
햄스트링 부상 등
생각보다 이탈하는 시간들이
길어지면서
18경기 7골의 성적과는 별개로
스스로에겐
조금 아쉬운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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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두 시즌간 주전으로 뛰었으나
확실히
전성기에 비해
득점력은 많이 떨어졌고
그럼에도
중요한 순간에
좋은 활약들을 많이 가져갔고
또 보이스 리더로
팀에게는 여러가지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평가.
2019 시즌이 끝난 후,
정조국은
강원과 이별을 선택하게 되었고
마지막 구단으로
제주와 계약을 맺게 되었다.
제주에서
1시즌간 활약하면서
12경기 1골로
시즌을 마감했고
결국 현역은퇴를 선언하게 되면서
정들었던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었으며
은퇴식에서
선수로써 밟아보지 못했던
아쉬운 마음과 함께
새로운 도전에 대해서 당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2006년
처음으로 국대에 데뷔했고
그 해
아시안컵 예선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가능성을 보였으나
다른 공격수에 비해 주목도 낮고
기회도 덜 받은 편.
2010 남아공 월드컵 앞두고
여러 번
국대명단에 소집 되었으나
부상 등
여러가지 악재가 끼게 되면서
결국 최종명단에서
탈락하게 되었고
2011 아시안컵 예비명단에도
이름을 올렸으나
그 때에도
부상이 겹치게 되면서
엔트리 탈락.
그 후로
국대와는 인연이 없었고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국대와 멀어졌다.
392경기 121골을
K리그 통산기록으로 가지고 있으며
이 기록은
역대 5위에 해당한다.
확실히 그는
국대와는 인연이 없었으나
K리그에서 꾸준하고 좋은 모습을 보였으며
프랑스 진출 시기가
없었다면
더욱더 높아졌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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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MVP는
우승팀에서 가져가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정조국은 광주 소속으로
우승권이
아님에도 득점왕 등
좋은 활약을 보이며 MVP를 차지했으며
역대 4번째 사례.
이전에는
안정환, 김은중, 김신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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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만큼 K리그에서
꾸준하고 기량이 좋았는 지
말해주는 수치로
이 기록은
신태용, 이동국이 가지고 있었는데
정조국이 합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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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FC에서
프로생활을 시작했던
프랜차이즈 스타이지만 팬들은
그에게 애증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안양 -> 서울
연고지 이전이 결정되는 시기에
정조국이
집에서 서울이
가깝다는 이유로
그 의견을 적극 지지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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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한일월드컵
유망주 선수들을 경험 시키기 위해
비엔트리이지만
데려갔던 유망주 선수들 중에는
최성국도 있었고
정조국과
청소년 대표에서도
투톱 형태로
찰떡 호흡을 자랑하며
미래로 불렸다.
하지만....
승부조작, 음주운전 등
되돌릴 수 없는
강을 건넌
최성국의 현실은 차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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