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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테반 캄비아소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정석(Feat. 별명은 엘 꾸추)

스포츠/축구

by Gugu_K 2021. 2. 2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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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정석

아르헨티나 국적

미드필더의 포지션을 가지고 있으며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교과서로 불리는 선수.

 

공수 밸런스가 훌륭하고

말 그대로

중원에서 상대편이 가지고 있던 공을

컷팅하여 공을 소유한 뒤

재빠르게 동료에게

연결하여 

공격을 이끌거나

본인이 직접 치고 들어가

마무리까지

할 수 있었던 만능의 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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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기보다

공격능력이 더욱더 뛰어난 선수로

2006 독일월드컵에선

26번의 패스가

끊기지 않고 티키타카로 이어져서 득점을 올렸던

바로 그 선수.

 

레알 마드리드 유스출신으로

1군에서도 뛰었고

최고의 전성기는

인터밀란 시절로 기억된다.

 

 

 

 

 

 

 

장발의 캄비아소, 레알에서 뛰었던 그

마드리드에서의 활약도 쏠쏠했다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처음 축구선수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고

1996년이 되던 해,

친 형 니콜라스 캄비아소와 함께

스페인으로 건너가

레알 마드리드 클럽 입성.

 

하지만,

결국 그 곳에서 프로무대 데뷔에

실패하게되고

다시 조국으로 돌아와

프로무대 데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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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팀을 거쳐

명문으로 불리는 리버 플레이트에서도

활약하기 시작했고

조금씩 폼이 성장하자

유소년 시절,

그를 키웠던 레알 마드리드가 다시 불렀고

다시 스페인으로 건너가

계약에 성공했다.

 

02-03시즌

마켈렐레와 함께 중원을 이루며

쏠쏠하게 활약했고

 

페레즈 회장이

세웠던 갈락티코 1기의 멤버들을 보좌하며

중원에서 묵묵히 

자신이 맡은 롤을 수행하며

알토란 같은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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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4시즌이 끝나고

중원의 파트너 마켈렐레가 첼시로

이적하게 되면서

중원의 파트너

엘게라, 베컴 그리고 캄비아소.

하지만, 본래

중앙 미드필더 포지션도 아니였던 베컴 등

경기력은 처참했고

시간이 지나면서

캄비아소 역시 주전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자,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낸

세리에A 인터밀란으로 새로운

도전에 나서게 된다.

 

 

 

 

 

 

 

최고의 전성기, 인터밀란 시절

주장도 종종 역임했던 인터밀란 시절

이 시기는

세리에A에서 인터밀란이 한 마디로

주름을 잡던 시대.

 

레코바, 베론

슈퍼스타들과 함께 중원에서 활약하며

팀을 이끌었고

 

공격의 즐라탄이 있다면

수비에는 마이콘,

그리고 바로 중원에는 캄비아소가 중심으로

꼽히던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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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후반

세리에A 최고의 중앙미드필더를 꼽으라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캄비아소를

외칠만큼 그의 폼은 절정 수준.

08-09시즌을

기점으로 그는 더욱더

수비적인 롤을 부여받아 라인을 내려

경기를 뛰었고

어느 위치에서나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해내는 그에게

시련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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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도

최고라는 평가와 함께

전성기를 구가했고

스네이더의 합류로 공격적인 부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어짐에 따라

수비에 집중하며

결국 인테르의

트레블 시즌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최고의 영광을 누린다.

 

그러던 와중,

재계약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인터밀란 구단주가

바뀌게 되고

캄비아소에게 재계약 카드를 내밀며

주급삭감을 요구했고

캄비아소는

끝내 거절하고 이적을 결심.

 

팬들에게는

너무나도 안타까운 순간이 되었고

곧 구단주 욕을

하게 되는데

캄비아소가 떠난 중원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며

인터밀란 암흑기의 시작이라고 해도

무리가 없었다.

 

 

 

 

 

 

 

클래스를 보여준 레스터시티 시절

나이가 들어도 클래스는 여전하다

자유계약으로

어느 팀이든 자유롭게 이적이 가능했던

그의 새로운 팀은

예상밖에

EPL 레스터 시티.

 

1년의 단년계약을 맺었고

팀에 합류하자마자

리그, 컵대회를 가리지 않고 클래스를 보이며

꾸준하게 활약하더니,

맨유와의 리그 경기에서

멋진 동점골과 함께

그 기세를 몰아 5:3 역전승의 주역이 되는 등

강한 임팩트로 데뷔골 작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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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에

31경기 5골을 기록하며 

여전한 클래스를 발휘하는 등 좋은 모습으로

그 해에

레스터 시티 팬들이 선정한

올해의 선수상 수상.

 

시즌이 끝난 후,

재계약 가능성이 굉장히 높았으나

예상밖에 캄비아소는

팀을 떠나

또다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고

너무나도 아쉬운 건

그 다음 시즌

레스터 시티는 정말 동화도 같은 시즌을 보내며

EPL 프리미어리그 우승 차지.

 

 

 

 

 

 

 

마지막 무대는 올림피아코스

끝까지 꾸준했던 캄비아소

2년 계약을 맺으며

노장으로써의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고

추가적으로 1년

연장계약을 맺기도 했지만

2년정도를 채우고

현역은퇴를 선언하게 되면서

그라운드를 떠났고

올림피아코스 시절, 이미 코치 라이선스를

획득하면서 제 2의 인생

준비를 마쳤다.

 

 

 

 

 

 

 

 

국가대표로써의 캄비아소

국대에서도 꾸준했던 캄비아소

연령별 대표를 모두 거친

엘리트 출신으로

1997년 세계청소년월드컵에서 주축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우승을 이끌었다.

이 때의 멤버가

리켈메, 아이마르 등등

 

2000년에

A매치 데뷔를 했으며

클럽에서 쌓았던 커리어에 비해서는

국대 커리어가

조금은 빈약하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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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독일월드컵에서

본선에서

터트린 골은 지금까지도 회자가 될 정도로

임팩트가 컸는데

사실 골 자체는 평범(?)했는데

그 과정에서

수비에게 한 번도 뺏기지 않고

26번의 패스가

오고가는

진정한 티키타카를 보여주었기 때문.

 

2011년 이후,

점점 더 국대에서 멀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은퇴했다.

 

A매치 52경기 5골

 

 

 

 

 

 

 

에스테반 캄비아소에 대한 TMI

 

 

 

01. 원래 농구선수를 꿈꿨다

 

어릴 때에는

축구를 싫어하고 농구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실제로 농구선수를 꿈꾸며

팀에 들어가 뛰었는데

오히려 팀에서

축구의 재능이 있다고 판단해 권유했고

그 후, 축구선수로

전향한 케이스.

가족들 역시 캄비아소가 농구선수로

성장하길 바랬다는 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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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2006 독일월드컵 최고의 득점을 기록했다

 

말이 필요없다.

골 과정을 보면 왜 그의 골이 최고인 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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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사네티와 절친이다

 

같은 국적이고

인터밀란에서 오랜기간을 함께 뛰면서

더욱더 친해진 케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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