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 좋아하는 농구선수에
앨런 아이버슨을
꼽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았던 기억이 있다.
그 만큼 앨런 아이버슨은
우승반지를
따내지는 못했지만
플레이가 화려하고
간지나는 모습을 보이며
자신의 왼팔에 새긴 문신,
직역하면,
강한 자만이 살아남는다.
그는 농구선수로써는
굉장히 작은 단신이었지만
그를 뛰어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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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이번 컨텐츠는
누구보다 간지나고
마이클 조던조차도 공격력을 인정한
이야기 해보자 :)
역대 최고의 드래프트 시즌 중,
하나로 꼽히는 1996년.
이름만 들어도
왠만한 농구 팬들이라면 알 수 있는
선수들이 로터리 픽된
1996년 드래프트에서
1순위를 차지한 선수가 바로
다름 아닌 앨런 아이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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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순위의 스테판 마버리,
5순위의 레이 알렌,
13순위의 지금은 고인이 된 코비 브라이언트,
14순위의 스티븐 내쉬,
17순우의 저메인 오닐까지.
기라성 같은
선수들이 루키로 나온 드래프트에서
앨런 아이버슨은
필라델피아가 팀으로 하위권에
쳐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활약과 득점력을 바탕으로
주목도가 높아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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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버슨의 외모는
루키 시즌에는 굉장히 평범했는데
평범했던 외모와 달리
실력은 남달리 너무나도 뛰어났으며
본인 스스로 잘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인터뷰나 여러가지 플레이를 통해
자신감 넘치는 발언을 하며
뭐 어쩌겠는가
그 작은 신장에도 불구하고
농구를 너무 잘하고 득점력이 뛰어난 걸...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결국 1997 시즌,
앨런 아이버슨은
평생 한 번밖에 받지 못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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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시절,
그가 주목받는 이슈가 하나 있다면
바로 그 당시에도
최고의 선수로 군림 중이던
신인에 사이즈 차이도
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앨런 아이버슨은 황제 앞에서
전~혀 주늑 들지 않았고
지금은 그의
시그니쳐 기술로도 회자되는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마이클 조던을 완전히 제쳐버리며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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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끝난 후,
마이클 조던은
이러한 앨런 아이버슨에 대해
그의 공격력을 인정하기도 했다.
래리 브라운 감독이
필라델리파의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면서
앨런 아이버슨은 더욱더
날아오르게 되는데
1번 역할로 뛰었던 그의 공격력을
더욱더 드높여주기위해서
당시 비난이 전무했는데
사이즈가 너무 작은 그가 2번 역할을
수행하는 게 공격은 뭐 그렇다쳐도
수비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
브라운 감독은
그 부분을 1번 포인트가드에
장신 선수를 세우며
앨런 아이버슨의 부족한 수비력을 보좌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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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99 시즌 앨런 아이버슨은
팀의 1옵션을 수행하며
8년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시켰으며
그 해에 득점왕을 차지하며
전성기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00-01 시즌에는
팀을 파이널까지 진출시키는
무서운 활약을 보여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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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운이 좋지 못했다.
파이널 상대는
오닐과 코비가 활약하고있는
최전성기의 LA레이커스였고
1:4 시리즈 패배를 당하며
준우승에 머무르는 데
지금도 많은 언론이나 팬들이
기억하는 필라델피아의 모습은
강력한 저력을 가진
레이커스를 상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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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앨런 아이버슨은
자신의 하이라이트 필름에도 현재까지도
자주 등장하는
타이런 루를 상대로
크로스오버 드리블로 완전히
앵클 브레이크를
시킨 뒤, 득점을 성공하고
타이런 루에
만들어내기도 했다 :)
계속되는 플레이오프 진출 후,
성적이 나오지 못하자
래리 브라운 감독은 해임하게되고
그를 신뢰했던 감독이
팀을 떠난 것이 이유가 되었을까?
앨런 아이버슨도
부상과 부진이 겹치면서
전성기에 보여주었던 모습에서는
조금 아쉬운 경기력을
보이게 되는데
06-07 시즌 개막을
얼마 남겨두지않은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게 된다.
아이버슨이 덴버로 이적하며
많은 팬들은 엄청난
기대감에 부풀었는데
덴버에는 신인급으로써 팀을
무섭게 이끌며
더욱더 높은 곳에
올라가기위해서 해결사 아이버슨이
합류하면 달라질 것이라는 것.
하지만, 이미 필라델피아 시절
끝물에 전성기의 폼에서
떨어진 앨런 아이버슨의
컨디션은 정상적이지 못했고
덴버의 성적은
아이버슨이 오기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게 되면서
구단은 다시 한번 트레이드를
감행하여 아이버슨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동안만
덴버에서 활약한 뒤,
팀을 떠나게 된다.
디트로이트로 이적했지만
아이버슨의 경기력은 돌아오지 못했고
무엇보다 디트로이트의
농구 스타일이 조직력을 중시하는 것에 비해
개인적인 플레이를 원했던
아이버슨과의
여러가지 문제점이 생겼다는 지적.
디트로이트 역시
아이버슨을 핵심자원으로 생각하며
영입한 형태가 아니였기에
그는 결국 다시 한번 팀을 떠나서
FA선수가 되었으며
그를 원하는 몇몇 구단과
협상을 벌였지만 결국 그의 자존심이
제시된 롤과 맞지 않아
계약을 이루어내지 못한다.
잠시 멤피스 유니폼을 입는 듯 했지만
결국 경기에 뛰지 못하는 등,
빠르게 계약은 파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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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그는 뛰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실제로는
그가 도박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계약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면서 앨런 아이버슨의 명성에
금이 가는 행보를 이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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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부상이 거듭되면서
아이버슨은 더 이상 뛸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고
2013년, 시즌 개막과 함께
필라델피아는 홈 첫 경기를 치르며
그의 선수 커리어를
마감하는 자리를 가졌다.
"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다 "
라는 명언을 남긴 아이버슨의
명언이 나올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은
바로 NBA선수로써는
굉장히 작은 편에 속하는
신장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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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선수로 은퇴한 뒤,
조금씩 3X3농구가 전 세계적으로
이슈몰이를 하게 되면서
아이버슨에게도 수많은 제의가 왔고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래퍼 아이스 큐브가 만든
3X3 대회에서 전격 데뷔하며
팬들에게 간만에 선수로써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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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과 수준이 다르다는
평가를 받은 NBA 선수들.
하지만, 올림픽 무대에서
금메달을 놓치며
어렵사리 동메달을 기록했던 시기가 있는데
그 당시 멤버로 뛰었던
앨런 아이버슨 역시 부진한 야투율과
함께 비난을 면하지 못하며
일종의 미국 드림팀의 굴욕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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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했던 루키시즌 외모와 달리
콘로우 헤어를 선보이며
앨런 아이번슨은 독보적인 마스크를 가진
유행을 이끄는 선수가 되었고
남다른 패션 감각을 바탕으로
많은 팬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선수.
흑인 농구선수를
대표하는 선수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힐만큼 그는 많은
지지를 받았던 선수였던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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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부분은
짚고 넘어가야할 부분이 있는데
바로 은퇴 후,
앨런 아이버슨이
애틀랜타에서 구걸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는 기사를 올린 것.
다만 이 기사를 낸 곳이
워낙 이슈거리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찌라시성 기사를
마구 내보내는 곳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신뢰할 수 있는
정보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계속해서 아이버슨을 따라다닌 건
도박을 즐겨하는 것 때문에
많은 돈을 잃고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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