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국적
축구선수로
현재에는 자국의 국가대표 감독.
자칭
불리며
AC밀란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보내며 활약했고
가지기는 했지만
전성기 때 보여주었던
그의 플레이는
확실히 레전드급의 모습.
플레이도 잘하는 선수로
알려져있다.
자국리그에서
가장 명문구단으로 꼽히는
디나모 키예프 소속으로
활약하며 빅클럽들에게
제대로 눈도장 찍은 시기.
97-98 시즌
챔스 조별예선에서
바르셀로나와 한 조였던
디나모 키예프는
기록하는 등
믿을 수 없는 경기력으로
말 그대로
바르셀로나를 떡실신.
그 해에
팀이 우승을 하진 못했지만
비교적 약팀으로
분류되는 상황 속에서
4강진출의 성과를 내었고
그 중심에는
단연 셰브첸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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챔피언스리그 득점왕 및
올해의 공격수로
선정되는 등
이미 세계에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알린
셰브첸코는
당시 유럽 최고의 리그로 불리는
세리에A AC밀란의
러브콜을 받으며
당당히 빅클럽에 입성한다.
99-00 시즌
AC밀란으로 이적했고
그 해에
클래스 시전.
적응기가 필요 없었고
부진했던 02-03 시즌을 제외하면
넣으면서
부동의 주전 공격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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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보다
골 결정력이 뛰어났고
빠른 스피드에
몸싸움과 테크닉이 잘 갖춰지면서
정말 말 그대로
스마트함까지 지녔기에
중앙이 아닌
윙어로 뛸 때에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유형의 선수였다.
03-04 시즌
셰브첸코는 세리에A 득점왕과
우승을 동시에
경험함과 함께
최고의 선수에게 주어지는
커리어의 정점을 제대로 찍는다.
다음 해,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이스탄불의 기적을
시연 당하며
리버풀에게 어이없이 패하는
수모를 겪기는 하지만
셰브첸코의 골 결정력을 포함한
경기력은 꾸준했고
셰브첸코를
비난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경기력 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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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또 하나 별명은
그만큼 그는
위대하고도 위대.
올린 선수로
기록되고 있으며
구단 레전드
군나르 노르달에 이어
구단 역사상 최다득점자 2위에
이름을 올렸고
그 기록만 깰 수 있을 것으로
보여졌지만
그는 새로운 곳으로
결과적으로
잘못된 이적을 선택한다.
셰브첸코의
첼시이적 중심에는
구단주 아브라모비치가 있었는데
축구와 첼시에 대한
애정이 넘치던 그는
어떻게든 셰브첸코를 영입하기위해
갖은 노력을 했고
미국인 모델
셰브첸코 아내까지 설득해
결국 첼시 유니폼을
입게 만드는데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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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점포를 가동하며
역시 클래스가 있다라는 말을
들으며 좋은 시작을
알렸지만
그로부터
셰브첸코는
팀에서 이탈하는 시간이 길어졌고
설상가상으로
팀내 경쟁자
드로그바의 독보적인 활약에
주전경쟁도 실패.
두 시즌동안
50경기에 가까운 공식경기를
뛰면서
먹튀소리를 들을 수 밖에....
셰브첸코가
첼시에서 실패한 가장 큰 이유는
첼시로 이적할 때
AC밀란에서
보여주던 전성기의 폼을
가지기엔
너무 시간이 흘렀고
무엇보다
세리에A 비해서
훨씬 빠르고 거친 EPL의 템포와
여러가지 몸싸움에
적응하지 못했단 평가가 지배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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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리그나 챔스 등에서
부진하고
비교적 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컵대회에서
득점을 올리는 수준이라
불명예스러운 별명이
생기기도 했으며
경기 도중,
의식을 잃은 존 테리를
응급처리로 빠르게 대처하면서
첼시 유니폼을 입고
소리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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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시 소속 중,
친정팀 AC밀란으로 돌아가
뛰기도 했지만
2골에 그치는 등
이미 폼이 떨어지며 부진했고
결국 첼시와
계약만료가 되면서
팀을 떠나게 되었고 첼시 역사상
한명으로 남는 아쉬운
결말을 보였다.
자국으로 돌아가
그나마 살아난 모습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20골 이상 득점하는 등
셰브첸코가
듣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현상이었고
폼이 이미 떨어졌고 체력적으로
쉽게 지치는
노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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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디나모 키예프에서
3년간 뛰며
노장의 투혼을 발휘하고
현역 은퇴했다.
1995년 A매치에
처음 데뷔경기를 치뤘으며
이 때부터
두각을 보였지만
우크라이나 자체적으로
팀 경쟁력은
매우 낲은 편이라
메이저 본선진출에 지속적으로
실패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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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번히
조3,4위를 반복하고
그나마
플레이오프 티켓까지 따내면
항상 패하며
셰브첸코는 가장 전성기 시절인
AC밀란에서 뛸 때
제대로
국대 커리어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편.
하지만,
묵묵하게 팀을 이끌었고
결국
셰브첸코는
처음으로 월드컵 무대를 누볐고
선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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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국에서 열린
유로2012를 국대 마지막 무대로
생각하며 뛰었고
1승을 따내며
우크라이라의 유로 역대 첫 승을
이루어내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본선에서 탈락하며
셰브첸코의
국대 커리어도
이 곳에서 막을 내렸다.
첼시 시절,
동료 존 테리가 쓰러지자
응급처치를 제대로 하며 셰브첸코가 사실
의사지망생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말 그대로
헛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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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나우두, 반니스텔루이, 앙리와 함께
셰브첸코는
4대 스트라이커로 꼽혔으며
전문기관에서
선정한 기준은 아니지만
특히 국내 팬들이 선정한 4명으로써
셰브첸코의 전성기는
그럴만한 가치와 실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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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브첸코의 전성기를 보았다면
그의 운동능력이나 스피드가 얼마나 뛰어났는 지
명확하게 알 수 있는데
그만큼 이렇게
전성기에 스피드와 운동능력으로
먹고살던 선수들은
말년에 갈수록 무릎부상이 오기 쉬우며
그 부상으로 인해
말 그대로 한순간에 폼이
떨어지는 문제를 겪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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